기대 큰 부모의 자녀교육은 서로에 피해… “군자는 손자를 안아도 아들 안지 않아”… 격대 교육의 중요성 다시금 일깨워 줘
윤용섭 등 공저/한국국학교육진흥원/글항아리/1만8000원 |
슬하(膝下)는 어버이나 조부모의 보살핌 아래라는 뜻이다. 선인들은 시구에서 ‘슬하분감(膝下分甘)’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분감(分甘)'은 사랑을 베푼다는 것이니 ‘슬하분감’은 무릎 아래서 받는 사랑이라는 의미다. 조부모가 어린 손자녀들 양육을 맡았던 전통사회의 대가족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노인이 스승이다’는 ‘격대교육(隔代敎育)’을 강조한 책이다. 조부모가 손자녀에게 친근한 정서의 인성 교육을 하는 ‘조손 교육’을 소개하고 있다. 오랜 세월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우리 전통사회에서 가계를 책임지는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녀를 돌보는 가족 형태는 일반적이었다. 자연스럽게 한 집에 살면서 조손 간에 교유와 교육이 이뤄진 것이다.
‘노인이 스승이다’는 조부모가 손자녀에게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인성교육을 했던 전통적인 조손 교육에 초점을 맞춘다. 사진은 구한말 서울에 사는 한 할아버지가 손자의 돌을 맞아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모습. 글항아리 제공 |
학창 시절 경험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큰 기대를 한다. 이에 미치지 못하면 부모는 쉽게 화를 낸다. 하지만 조부모는 다르다. 한 세대를 건너뛴 관계인지라 손자녀에 대한 기대나 갈망이 상대적으로 작다. 격대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육은 질책이나 비난보다는 너그러운 타이름이 많다. 격대교육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가 손자녀를 돌보는 곳은 주로 안채였다. 이곳에서 조모의 모든 교육이 이루어졌다. 할머니는 아이의 배변 훈련에서부터 옷 입기, 밥 먹기, 말버릇을 가르쳤고, 놀이와 동요 교사 역할까지 수행했다. 할머니의 무릎은 옛 이야기가 구연되는 무대였다. 소설가 유안진은 할머니의 무릎 위에서 혹은 할머니의 무릎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무릎학교’라 불렀다.
저자들은 격대교육의 효과를 입증하는 외국 사례도 들려준다. 대표적인 경우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바마는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하고 열 살부터 대학 때까지 외조부모 슬하에서 교육받았다. 불행의 나락에 빠져들 수 있었던 그를 미국 첫 흑인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은 주역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였다. 이들은 손주가 피부색깔 때문에 상처받지 않도록 정성을 쏟았다. 곁을 떠난 오바마 아버지에 대한 험담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긍정적 세계관을 갖고 밝고 힘차게 살아온 배경에는 사려 깊은 조부모의 사랑이 있었다. 격대교육은 비단 가족 내에서 그치지 않는다.
74세의 중국 노학자 옹방강(翁方綱)은 24살의 조선 청년 추사 김정희(1786~1856)를 깊이 사랑했고, 12살의 장한나가 20세기 최고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가 된 건 격세의 편안함과 따스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조는 83세의 고령으로 은퇴하는 오리 이원익에게 ‘대로(大老)’라는 호칭을 썼다. 대로는 만인의 귀감이 되어 만백성이 부모처럼 따르는 노인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 학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출생에서 16살 때까지를 꼼꼼하게 기록한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을 남길 만큼 손자에게 각별한 애정을 나타냈다. 하지만 현대 핵가족 시대에 들어서는 이런 미풍양속이 거의 사라졌다.
‘100세 시대’라는 말은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 3년 후인 2018년에는 우리나라도 고령화사회를 지나 고령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 지난 7월 현재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의 비율이 13.1%였다. 2060년에는 40.1%로 높아져 세계 2위로 올라설 것으로 보인다. 늙은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를 너무 어둡게 볼 것만도 아니다. 저자들은 요즘이야말로 전통사회 격대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맞벌이 시대에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더욱 필요해졌다. 저자들은 퇴색한 조손 관계를 회복하고 사라진 격대교육을 상기하면서 노인과 사회가 시대에 적응해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책 필진으로는 국학진흥원 윤용섭 부원장과 김미영 수석연구위원, 장윤수 대구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작가 겸 칼럼니스트 최효찬씨, 장정호 부천대 영유아보육과 교수, 이창기 영남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참여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