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건립한 중국의 마지막 왕조다. 17세기 초 명나라를 완전히 굴복시킬 당시 청나라 홍타이지는 10만여명의 기마병과 보군 20만명을 동원했다. 만주 초원에 있는 청나라 인구는 200만명을 약간 웃돌았다. 지금도 불가사의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명은 인구 수천만명이 넘는 대국으로 상비군만도 200만명을 헤아렸다. 명은 송대의 우수한 문물과 인재가 풍부한 나라였지만 청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양녠췬 지음/명청문화연구회 옮김/글항아리/3만6000원 |
양녠췬 중국 인민대 청사연구소 부소장이 쓴 책 ‘강남은 어디인가’는 만주족이 중국의 지배세력이 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여기서 강남은 장시성, 저장성, 안후이성 지식인 사회를 일컫는 용어다.
연암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중원의 사람들은 강희제 이전엔 모두가 명나라의 유민이었으나 강희제 이후로는 청 왕조의 신민이 되었다.” 사신으로 연경을 돌아보면서 든 생각이다. 간단한 지적 같지만 핵심을 꿰뚫은 말로 평가된다. 이 책은 박지원의 말을 논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청대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는 통상적인 틀은 중화중심주의를 내세우는 한족 중심론이었다. 열등한 만주족이 우수한 한족 문화에 흡수되어 결국 동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매우 낯익으면서 낡은 통설이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되뇌고 있는 게 지금 청사(淸史) 주류학계다. 미국 중심의 중국학계는 반발한다. 이른바 ‘신청사(新淸史) 이론’이다. 여러 민족의 공존을 모색하는 청나라 특유의 지식인 통치방식을 개발했다는 게 신청사 이론의 골자다.
만주족은 면밀한 계획에 따라 한족 중심사회의 안정을 이뤘으며, 이 과정에서 강남 사인(士人)으로 대표되는 한족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만주족 지배세력과 한족 지식인 사이의 접점은 ‘명대 왕조에 대한 반성’이었다. 근검, 붕당의 근절, 예(禮)의 재건은 양측의 공통 지향점이 되었다.
강남 사인들은 본래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명 왕조의 방탕함을 비판하는 청 주장에 동의하면서 돌아섰다. 강남 사인들은 사치를 멀리하고 질박함을 생활규범으로 삼았던 청의 제왕들을 재평가하기에 이른다.
명나라 말기 강남 사인들은 ‘제세’와 ‘경세’ 등 실용적 입장을 강조했다. 이는 청 제왕들의 북방이념과 일치했다. 이 같은 지배세력과 지식인 사이의 합류는 명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대의 지배세력과 지식인들은 그만큼 유리되어 있었다. 청이 중국을 지배한 것은 결국 제세와 경세였다. 관념이 지배하는 명대와는 차원이 다른 지배 이념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근대 중국사를 연구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