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루(가명·29)씨가 20대에 배워야만 했던 것은 ‘단념하는 법’이었다. 남씨는 서울 유명 사립대에 입학했지만 그의 부모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남씨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는 대출금 이자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학업 외 모든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연애 문제로 고민하는 TV 드라마와 영화 속 대학생들의 삶은 결코 남씨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남씨의 상황은 군을 제대한 뒤로 더 나빠졌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연 이자율이 30%가 넘는 사채 1000만원을 쓴 것이 화근이 됐다. 족쇄가 된 이자는 남씨를 자주 멈춰 세웠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사채의 수렁에서 발버둥친 것만 수년. 남씨는 입학 10년 만인 올해 졸업생 명단에 겨우 이름을 올렸다.
남씨는 스스로 포기를 강요받았다고 여기는 20·30대 즉 ‘다(多)포세대’, ‘N포세대’다. 이 신조어는 쓰인 지 수년이 지나 일상적 용어가 됐다. 그러나 그 포기의 항목은 연애, 결혼, 출산 등에서 출발해 희망, 삶까지 영역을 넓히며 매번 갱신 중이다.
◆20·30대 3명 중 2명 “나는 N포세대”
“연애도 끝을 냈는데 친구 만날 여유가 있겠어요?” 오모(28)씨는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한 것만 벌써 5년째다. 1차 시험을 통과한 뒤 2차를 준비 중인 오씨는 “시험만 통과하면 상황이 반전될 것”이란 믿음 하나로 여자친구를 포함한 인간관계를 차례로 끊어냈다.
꿈과 희망 같은 거창한 것을 이루기 위한 포기는 아니다. 오씨는 “회계사가 꿈인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3대 회계법인에 입사해 다른 직장인 동기나 친척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인사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최근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인 20·30대 남녀 1675명 중 1156명(69.0%)이 자신을 “N포세대에 속한다”고 답했다. 청년세대 3명 중 2명 이상이 삶의 주요 가치를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포기했다고 밝힌 구체적 항목은 결혼(56.8%), 꿈과 희망(56.6%), 내 집 마련(52.6%), 연애(46.5%), 출산(41.1%), 인간관계(40.7%) 등이었다.
이 같은 청년세대의 문제의식은 결국 사회를 겨눴다. 응답자들은 N포세대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으로 △경제적 안정(33.3%) △경쟁 위주의 사회 분위기 변화(26.9%) △국가 정책 지원(21.5%) 등을 꼽았다. 이에 반해 개인 의지와 정신력을 꼽은 이는 8.0%에 그쳤다.
◆포기 끝에 다다른 ‘절망범죄’
“죽고 싶은 마음에 집을 나왔는데 이마저도 어려워 정말 화가 났습니다.”
최근 현주건조물방화 혐의로 구속된 조성렬(가명·22)씨는 경찰 조사에서 “차라리 감옥에 가고 싶었다”며 범행 이유를 진술했다.
조씨를 검거한 인천 부평경찰서 관계자는 “조씨가 이전에 카드 빚을 졌다가 부모가 갚아준 적이 있었는데, 또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생기자 심적 부담을 느껴 집을 나왔고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조씨에게서 어떤 희망이나 의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전했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인천국제공항 폭발물 소동도 이 같은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공항 화장실에 아랍어로 된 협박 메시지와 폭발물로 위장한 부탄가스통 더미를 놓고 간 혐의(폭발성물건파열 예비음모, 특수협박)로 구속된 유모(36)씨는 경찰 조사에서 “대학원까지 마쳤지만 취업도 못하고 돈도 떨어져 짜증이 났다”고 진술했다.
중앙대 이병훈 교수(사회학)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 등 사회문제가 청년세대를 끝없이 주저앉힌 끝에 누적된 분노가 ‘묻지마 범죄’ 같은 형태로 표출된다”며 “정부 차원에서 청년들이 일탈하지 않도록 일자리 마련, 공정 경쟁 등 제도적 출구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환·이동수 기자 hw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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