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선용 위한 법률적 바탕 마련에 역량 집중해야”
판사 3명이 재판하는 합의부 법정의 일반적 풍경.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재판 업무도 ‘인공지능 판사’가 대체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을 시작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외국 바둑계도 이세돌 9단의 승리를 점쳤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류 대표’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2번 연속 허무하게 지고 말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인공지능 판사는 민주주의·삼권분립 침해”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직전에 법률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세돌 9단이 꼭 알파고를 이겼으면 좋겠다”면서 “만일 컴퓨터가 이긴다면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판사는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이 재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의문을 제기한 뒤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으리라. 그러한 세상이 온다는 것은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보는 것처럼 인공지능 그 자체 또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소수의 사람이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모든 것을 통제하는 세상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조화롭게 조정하고 힘 있는 특정세력이 독주하는 것을 견제하는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가치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은 2013년 ‘우리의 직업을 얼마나 컴퓨터에게 내줄 것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총 702개 직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라 오는 2030년까지 이 직업들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47%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망했다. 여기서 판사의 경우 사라질 확률이 40%에 달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제법 높은 전문직종으로 분류됐다.
이는 판사의 업무 특성과 무관치 않다. 형사사건의 경우 판사는 형법 조문, 검사가 제출한 공소장과 증거물 등을 바탕으로 유무죄 여부와 형량을 결정한다. 컴퓨터에 온갖 데이터를 입력한 뒤 결과를 예측해보는 시뮬레이션과 무척 닮았다.
민사사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기관을 상대로 하는 행정소송, 이혼 등을 목적으로 하는 가사소송도 마찬가지다. 판사는 원고와 피고의 대리인이 각기 제출한 서류를 분석하고 법률 조항에 비춰 검토한 뒤 누구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는지 판단한다. 새롭게 입력된 정보를 기존에 구축된 데이타베이스(DB)와 비교해 최적의 결론을 내리는 컴퓨터와 흡사하다.
인간의 지력을 넘어선 인공지능의 괴력 앞에 한국 사회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강민구 부산지법원장은 “이제는 인공지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선용을 위한 법률적 바탕을 강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전관예우·법조브로커 사라지고 비용도 ↓”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무릎을 꿇은 것을 계기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알파고처럼 ‘완벽한’ 판사한테 재판을 받고 싶다”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는 컴퓨터가 인간보다 더 정확하다는 믿음에서 비롯한 바가 크다.
상당수 인간은 정확성은 물론 공정성 면에서도 기계가 사람보다 낫다고 여긴다. 한국 법조계는 ‘전관예우’, ‘법조브로커’,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 여러 병폐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해 판사석에 앉으면 전관이나 법조브로커의 영향을 받는 일도, 수임료의 높고 낮음에 좌우되는 일도 없이 공정하게 판단할 거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실제로 법조계 관계자들은 ‘인공지능 판사’에 의한 재판의 장점으로 △낮은 법률비용 △법조브로커·전관예우 의혹 소멸 △신속한 결론 도출 등을 꼽는다. 우리 법원의 3심 제도는 ‘인간은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라는 전제 아래 만들어졌다. 1·2심의 잘못된 판결을 대법원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 심급제도를 도입한 취지다. 하지만 컴퓨터가 재판을 하면 3심 제도는 필요가 없어지고 자연히 판결 확정도 빨라질 것이다.
그럼 ‘인공지능 판사’에 의한 인간 법관의 대체는 바람직할까. 현직 판사를 비롯한 법조계 관계자 상당수는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률신문 기고문에서 “법을 포함한 사회과학 분야에서의 ‘불확실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판사 또는 법률가의 존재 의의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인공지능 판사’에게 확실한 변수를 입력해 얻은 판결이야 신뢰할 수 있겠으나, 변수 자체가 불확실한 경우는 그 판결을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알파고가 안팎의 예상을 깨고 이세돌을 이긴 것처럼 언젠가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서는 날이 올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강민구 부산지법원장은 “많은 사람이 알파고의 위력을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며 “이런 인공지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어떻게 선용될 수 있는가에 법률적·제도적·기술적 바탕을 강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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