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만 열심히 맞던 김상범은 어느 날 대오 각성한다. 앞으로 ‘새상식으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물에 빠진 놈이면 돌을 안겨주고, 자리를 양보하기보다 발을 차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상범은 남을 밟고 올라선다. 속이고 뺏고 모략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국물 있사옵니다’는 국립극단이 3년째 진행하는 ‘근현대극의 재발견’ 시리즈 중 하나다. 작가 이근삼이 1966년 초연한 희곡을 서충식이 연출했다. 50년이란 시간차가 있음에도 상범의 세상은 21세기와 판박이다. 임시직은 처량하고 월급에서 하숙비를 제하면 손에 쥐는 돈은 형편 없다. 상범은 취업난에 시달리는 동생에게 ‘앞문이든 뒷문이든 돈을 써서 들어가라’고 충고한다.
상범의 출세기는 씁쓸한 웃음기를 머금은 블랙코미디로 연출된다. 극은 지루할 새가 없다. 호흡은 빠르고 분위기는 명랑하다. 배우들은 시대극의 어투를 쓰다가 때때로 만화처럼 과장된 동작을 선보인다. 상범의 권모술수는 평이하지만 여러 상황이 얽히며 흥미롭게 전개된다. 50년 전 쓰여진 희곡은 현대 관객에게 ‘정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정답인가’하는 난제를 던진다. 다만 결말에서 상범의 절망에는 공감이 덜 간다. 상범이 취할 조치로 바로 유전자 검사, 증거 축적, 상속 후 이혼 준비 등의 단어가 떠오르는 걸 보면 21세기는 50년 전보다 더 영악해진 게 분명하다.
무대 뒤편에는 콘크리트 계단 여러 개가 겹겹이 사선으로 놓여 있다. 무대는 출세와 생존을 위해 계단을 기어올라야 하는 고단한 삶을 대변한다. 박완규, 유순웅, 유연수, 이종무, 우정원, 박지아 등 국립극단 무대로 익숙한 배우들이 대거 나온다. 상범 역의 박완규는 2시간 동안 어리숙한 노총각에서 거리낌 없이 남을 협박하는 회사 간부로 능숙하게 변신한다.
송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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