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잘못된 한국 사회 ‘리셋’하고 싶다”
“하겠습니다. 내일 만날까요?” 인터뷰 요청 세 시간 만에 날아온 휴대전화 문자는 그래서 더 반가웠다. 하긴 정치권으로 간 뒤 20대 총선을 거치면서 그에게 언론 접촉은 일상화한 터다. 그는 오전 10시 반 약속장소인 서울 반포 매리어트 호텔 커피숍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지난 2월 더불어민주당으로 간 그는 4·13총선 당시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으로 공약 생산에 깊이 관여했으나 20대 국회가 출범한 현재 공식 직함이 없는 상태다.
―정치권으로 왜 가셨나.
“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일조할 수 있을까 해서.”
―정권을 왜 바꿔야 하나.
“한국 근대사는 일본 근대사회를 생각 없이 베낀 것이다. 우리가 대단하게 설계해서 만든 게 아니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재설계해야 한다. 그런데 오리지널인 일본도 재설계를 못하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베낄 수가 없지. 지금 정권이 바꿔볼 생각이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퇴행적이니 정권이라도 바꾸고 봐야겠다 생각했다. 한국은 지금 디자인이 아주 잘못돼 있는 나라다.”
―일본을 베꼈다는 게 무슨 말인가.
“투자 용처는 정부가 정하고 그걸 갖고 대기업이 수출해서 그 이익을 나눠 갖는 식의 경제 발전 모델을 말한다. 우리는 그 기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게 성장이 될 때는 문제가 없는데 이제 성장률이 내려가지 않나. 물이 차면 배가 뜨지만 물이 내려가면 그 동안 방치했던 문제들이 드러난다. 이제 암초를 제거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물이 다시 올라가겠지, 생각한다.”
20대 총선 전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긴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은 “한국은 국민의 70∼80%가 안정적으로 살 수 없는 나라”라며 “리셋(재설계)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3일 서울 반포 매리어트호텔에서 두 시간 넘도록 진행됐다. 하상윤 기자 |
“저성장·고령화 시대에 소득 양극화가 심하다. 우리 체제의 가장 큰 문제가 그 안에서 국민의 70∼80%가 안정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 문제는 원청·하청 체제, 지대추구의 사회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게 전체 파이가 커질 때는 괜찮았는데 성장률이 떨어지면서 중하위층에 주름이 잡히게 된 것이다. 둘째, 소득 재분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20%도 안 되는 세율로는 소득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건드리지 않고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건 거짓말이다.” 지대추구(地代追求, rent-seeking)란 기존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는 방법을 찾으면서도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는 않는 활동을 포괄해 일컫는 경제학 용어다.
―역대 정권 모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아닌가.
“노무현 정권만 하더라도 문제의식은 있었는데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 되돌아갔다. 747(경제성장률 7%, 국민소득 4만달러, 7대 강국) 공약이 그렇듯 성장률로 어떻게 다시 한번 단물 빨아먹어 보자 한 거지. 국민들은 달콤한 첫 키스의 추억처럼 고속성장의 추억에 연연하니 이를 이용해 먹은 거다. 박근혜 정권은 경제민주화를 팔아먹고 다시 퇴행했다. 경제정책은 정신적으로 파산했다.”
―타이밍을 놓친 것인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모두 리셋하겠다고는 했지. 그러나 한국 사회는 준비가 안 돼 있었다. 보수정권 추억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여당 집권 8년 동안 트리클다운(낙수효과)은 완전히 깨졌다. 리셋할 타이밍으로는 지금이 10년 전보다 좋다. 변화의 열망이 굉장히 강하다.”
그는 더민주에도 비판적이다. “대선 전에 경제민주화특위에 친구인 유종일(KDI교수)가 와 달라고 해서 갔더니 내실 없는 껍데기라고 느꼈는데 이번에도 똑같더라”며 “한마디로 떴다방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럼 왜 더민주인가.
“문재인 쪽 사람을 통해 작년 12월에 처음 들었으나 그땐 거절했다. 가망이 없어 보였으니까. 당이 무너져가는데 수습할 리더십이 보이지 않더라. 혹시 김종인 박사가 가시게 되면 모르겠다고는 생각했는데 우연찮게도 그렇게 됐다. 그래서 김 박사가 같이 일하자고 했을 때 해볼 만하겠다 생각했다.”
―비례대표로 배지를 달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도 없었지만 주지도 않더라. 정책 플랫폼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간 거지 비례대표가 목적이 아니다. 내 취미가 경제정책 아닌가. 생각이 같으니 같이 일할 만하다는 것일 뿐 난 김종인 사람도 아니다. 김 박사와는 시각이 비슷하다. 그의 복지국가, 경제민주화에 공감한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의 인연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범여권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던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의 불출마 선언을 돕기 위한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첫 인상이 어땠나.
“당시 국민연금이 엄청나게 중요한 경제정책 이슈인데도 별로 얘기가 안 되더라. 관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정운찬 불출마 선언을 계기로 알게 되었는데 이 양반이 국민연금 개혁 얘기를 하더라. 아, 이분이 뭘 좀 아네, 했다. 김 박사는 처음으로 국민연금 이슈에 대해 통한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더민주 공약 중 ‘국민연금을 활용한 공공임대주택 확대’가 있었다. 국민연금을 활용해 총 주택수 대비 공공임대주택 비율을 6%에서 12%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서민층은 주거비 부담을 덜고 국민연금은 안정적 투자처를 찾는 윈윈 모델이라는 설명이다. 더민주는 건강보험료 소득기준 부과, 노인 기초연금 30만원으로 인상, 국공립대 등록금 사립대의 3분의 1로 인하 등도 내걸었는데 모두 그가 밀어붙인 공약들이다. 그는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데 일가견이 있다. 한화증권 사장 시절의 개혁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1983년 미국 스탠포드대 캠퍼스에서 포즈를 취한 청년 주진형. |
“동의하지 않는다. ELS(주가연계증권)에서 리스크 관리를 잘못해 대규모 손실이 났지만 개혁으로 손해 본 것은 없다. 회사 상태는 훨씬 좋아졌다. 회사와 고객이 윈윈하는 모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고객 뜯어먹는 식의 주식영업 하기 싫은 직원들 중엔 이게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양심적으로 불편했는데 좀 덜 벌어도 떳떳해서 좋다고 하더라.”
2013년 9월 한화증권 사장 취임 이후 그는 줄기차게 개혁 조치들을 쏟아냈다. 불필요한 과당매매 제한, 매도 의견의 리포트 비중 확대 등 기득권이 된 관행을 깨고 투자자의 이해를 돌보는 일이었는데 항명 사태 등 반발이 이어졌다. “잦은 주식거래로 수수료 수익을 챙겨 보너스를 받기 원하는 직원은 고객 보호를 통해 영업하려는 우리 회사가 원하는 직원이 아니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반박하며 개혁을 밀고 나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부정적 리포트로 한화그룹과의 갈등설이 불거졌는데.
“합병 무산 가능성을 지적한 리포트를 내기 전 날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했더라. 삼성과의 관계도 있으니 자제해 달라고. 알아서 하겠다고 답하곤 그대로 발표하라고 했다. 그 뒤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의 합병반대 가능성을 언급한 리포트를 냈더니 그룹에서 전화해 경질될 수 있다고 하더라.” 작년 9월 말 임기 6개월 남은 그의 자리엔 후임이 내정됐다.
이력을 보면 그는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투자증권 전무이던 2007년 느닷없이 사표를 던지고 오랜 백수 생활에 들어가기도 했다. “경영임원 해보니 사람 망가지겠더라. 사람을 도구로 보게 되더라”고 회고했다. 배경으로 “돈이나 출세를 우습게 보는 집안”이라고 가풍을 소개했다. 2년 전 작고한 그의 부친(주종환)은 진보적 경제학자로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지나치게 검소한 것도 가풍의 영향인 듯하다. 그의 차는 15년된 구형 SM5다. 25인치 브라운관 TV를 재작년까지 봤다. 친구인 조준호 LG전자 사장이 집에 오더니 “너 같은 사람 많으면 우리 회사 망하겠다”면서 집에서 쓰던 LCD TV를 선물해 그제야 바꿨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까칠한 모범생’이었다. “돈 좀 갖다주면 편애하고 불공평하게 대하는 선생님들을 보면 말 안 듣고 대들었다”고 한다. 국민(초등)학교 성적표엔 매 학년 공통적으로 “고집이 세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우리 사회 주류에 대해 “길들여진 모범생 출신들이 자리 욕심에, 기득권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할 말 안 하고 입을 닫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류순열 선임기자 ryoosy@segye.com
◆ 주진형(57)은…
△1959년 서울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 존스홉킨스대 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삼성증권 마케팅담당 상무대우 △우리투자증권 리테일사업본부 전무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더불어민주당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
△1959년 서울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미 존스홉킨스대 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삼성증권 마케팅담당 상무대우 △우리투자증권 리테일사업본부 전무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더불어민주당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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