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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인간 최승희, 이념 벗고 ‘진실’로 부활하라

입력 : 2017-05-13 02:00:00 수정 : 2017-05-12 19: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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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끝〉 연재를 마치며 최승희는 여러 면으로 우리 무용계의 전설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전설이 ‘인간 최승희’의 본래 모습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늘 들었다. 나는 이를 부정확한 사실에 바탕해 저마다 입맛대로 해석·추측하고, 때로는 이념의 색깔까지 덧칠해온 탓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이 기사를 연재할 용기를 낸 배경이다.

총 20회에 걸친 이번 연재 기사는 4월 말로 끝을 맺었다. 첫 기사를 지난해 11월 19일자에 게재했으니 반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이 기사를 연재하는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한 가지라도 더 담으려고 내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다.

연재 도중에 내가 새로 입수하거나 발굴한 최승희 관련 자료, 사진들이 꽤 많았다. 이 노력 못지않게 사실 검증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이 과정에서 기왕에 나온 최승희와 관련해 정설처럼 알려진 내용이 진실과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29년 겨울의 최승희.
가장 기초적인 사실관계에서 명백한 오류를 발견했을 때는 솔직히 당혹스럽기도 했다. 최승희의 아버지 최준현의 한자만 하더라도 ‘준현(俊鉉)’, ‘준현(浚鉉)’ 등등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용현(庸絃)’이란 이름도 보였다. 내가 이번에 여러 갈래로 교차 확인한 바로는 ‘준현(濬鉉)’이 맞다.

이게 단순한 것 같지만 중요한 이유는 최승희의 고향 논란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이름을 기초로 최승희의 고향 추적을 했던 기록도 더러 있었다. 이 논란이 이번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됐다. 내가 일제강점기 대정(大正) 원년인 1912년 11월 6일 우리 역사상 처음 작성한 ‘토지조사부’를 뒤져 최승희가 태어난 정확한 집주소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1940년 해외공연에서 돌 아온 후 딸 안성희와 함께한 최승희.
최승희의 출생지는 서울이라는 것이 오래전부터 정설처럼 통했다. 최승희 스스로 1936년에 나온 일어판 ‘나의 자서전’에서 “내가 출생한 곳은 경성이었지만…”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의 첫 항목 ‘아버지’란 제목의 글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하고 있다. 잡지 신인문학 1936년 1월호에는 “(최승희)씨는 경성 수창동 출생으로…”라는 대목이 나온다. ‘일춘생(一春生)’ 명의의 ‘최승희씨의 승리적 반생과 분투기’란 기사 속에서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강원도 홍천설이 새롭게 제기돼 세인들의 관심을 끈 적도 있다. 최승희가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서 태어나 6살 때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이 성립하려면 최승희가 그때까지 부모와 함께 홍천에서 살았어야 상식에 부합한다. 그런데 최승희의 아버지는 이미 1912년 11월에 서울에 주소를 두고 있다. 1911년 11월 24일생인 최승희의 첫돌 무렵이다.


최승희의 보살춤.
경성부 서부 수창리(동) 198번지가 그곳이다. 앞서 말한 1912년 토지조사부에 이 번지수 51평 넓이의 대지 소유자가 분명 최준현으로 되어 있다. 최승희가 태어난 집은 지금까지는 수창동 134번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앞서 주소지는 동은 같은데 번지수가 다르다. 당시 토지조사부의 134번지 소유자는 김진수(金鎭洙)로 나와 있다. 이를 보면 최승희의 고향은 서울이 맞고, 태어난 집주소는 수창동 198번지가 확실해 보인다.

최승희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았던 헤어스타일인 단발머리를 두고도 새로 확인한 사실이 있다. 최승희의 단발머리는 남편 안막의 조언에 따른 ‘안막의 작품’으로 지금껏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에 입수한 사진들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이 또한 억측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1926년 이시이 바쿠 제자가 된 이후 단발머리 모습이 보인다. 숙명여고보 재학시절 등 그 이전까지의 사진에는 댕기머리 등 모두 긴 머리를 하고 있다. 최승희가 안막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 것은 1931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최승희는 안막을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는 역사적으로 긴 머리를 선호하던 서양 여성들 사이에 단발머리가 크게 유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20년대 초반 인기 미국 여배우 콜린 무어, 루이스 브룩스 등이 출연한 영화로 단발머리 선풍을 일으켰다. 최승희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은 듯 단발머리 스타일이 매우 닮은 모습이다.

남편 안막이 본명 안필승이란 이름을 바꾼 시기와 이유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안필승이 아내 최승희를 뒷바라지하는 매니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이는 사실이 아닌 추측이고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이번에 내리게 되었다. 최승희 기사를 연재하면서 관련 문헌을 폭넓게 뒤져본 결과이다.


최승희의 단발머리는 남편 안막의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조사 결과 안막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단발머리를 고수했다.
안막은 최승희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 필명을 쓰고 있었다. 최승희와 결혼하기 2년 전인 1929년부터 안막이란 이름이 기록에 등장한다. 1929년 7월 16일자 동아일보 “‘푸’예 동경지부, 푸로극장 전 조선 순회공연” 기사가 그 보기이다. 공연작품 중 ‘하차(荷車)’의 연출가를 안막으로 밝히고 있다. 또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는 1930년 4월 안막을 권환(權煥)과 함께 새로운 중앙위원으로 선임했다는 내용이 그해 4월 29일자 조선일보에 나온다.

최승희와 결혼하기 전 안막이란 이름으로 쓴 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930년 4월 19일부터 5월 29일까지 중외일보에 18회 연재기사 ‘맑스주의 예술비평의 기준’에서도 필자명은 안막이다. 일제강점기 잡지 삼천리 1938년 10월호에 ‘아하, 그리운 신부시절’이라는 제하의 기획기사가 실려 있다. 최승희는 ‘박영희씨의 서재에서’란 제목으로 안막과의 첫 만남을 회고하는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그이가 즉 박영희씨와 오빠가 내게 선택해 주신 안필승(安弼承)씨였습니다. 그의 일흠은 일반으로 안막(安漠)이라고 한다는 것도 그날 알었습니다.” 


1936년 금강산에서 최승희 부친 최준현(왼쪽)과 최승희(가운데), 안막. 최승희 부친의 한자는 지금껏 제각각으로 표기돼 왔다.
최승희는 1936년에 나온 일어판 ‘나의 자서전’ ‘결혼’편에서 안막이 신문사에서 지어준 필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시이 선생의 어명을 무단으로 도용하고 있다고 괘씸하다는 소문도 나왔지만, 사실 안막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집필하고 있는 신문사에서 마음대로 붙인 필명으로, 이것이 일반적으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그럼 신문사는 왜 하필 ‘막’이란 이름을 선택했을까. 안막이란 이름의 막은 맑스의 ‘맑’을 음차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김진영 연세대 노문과 교수도 그중 한 명이다. 김 교수는 “…실은 ‘막스(마르크스)’와의 연결성도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2015년에 발표한 ‘일본 유학생과 러시아문학’이라는 제목의 논문 중 안막 이름 관련 각주를 통해서이다. 김 교수는 그 근거로 “가령 ‘막(mak)’으로 일본 도서를 검색하면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관련 책자들이 화면에 무수히 나타남을 보라”고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안막은 젊을 때부터 자타가 인정하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안막이 일찍부터 카프에 참여했고, 광복과 함께 북한을 선택했던 이유도 이런 사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김 교수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나는 앞으로도 이런 방향의 노력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내친 김에 ‘인간 최승희’의 온전한 모습을 담은 완성본을 책으로 펴낼 계획도 있다. 이는 내게 더 큰 꿈이 있어서이다. 동북아의 평화 정착, 공동 번영, 상호 협력을 꾀할 수 있는 최적의 역사 인물이 최승희라는 생각 때문이다.

베세토(BESETO) 벨트라는 말이 있다. 중·한·일 3국의 수도 베이징(BEIJING)·서울(SEOUL)·도쿄(TOKYO)를 잇는 축을 말한다. 이 세 도시는 공교롭게도 최승희가 오래전에 ‘동양발레’를 앞세워 활동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지금도 최승희의 작품이 살아 숨쉬고 제자들이 활동하는 곳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베세토 벨트 구축의 원조는 최승희가 아닐까 싶다. 최승희를 내세우면 평양도 자연스럽게 베세토 벨트 안에 포함된다.

나는 문화의 위대한 힘을 믿는 일종의 문화우선주의자이다. 최승희를 주인공으로 삼아 문화로 동북아 평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내 꿈이 좀 거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꿈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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