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서울 혜화역에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리고 있다. 뉴스1 |
인권위 관계자는 17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인권위는 혐오표현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라는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관계자가 언급한 가이드라인은 혐오표현이란 무엇인지,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여성우월주의를 표방한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WOMAD)’가 연일 논란의 중심에 서 있고 ‘혐오민국(혐오+대한민국)’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지만, 인권위에는 혐오표현을 가려낼 기준조차 없다는 뜻이다.
인권위는 “올해 말까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2016년 한 차례 연구용역을 진행했고 내부 검토가 있었다. 그러나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인권위 차원의 정책 권고는 따로 내지 않았다”며 “현재 후속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가이드라인 부재’는 인권위가 그간 혐오표현에 안일하게 대처해온 것 아니냐는 비판을 부를 수 있다. 혐오표현 관련 언론 보도는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인권위의 의뢰로 숙명여대 산학협력단이 작성한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보고서에서는 “혐오표현이 한국에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한 것은 대략 2010년경부터”라며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것은 2012년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등장과 관련이 있다”고 진단했다. 인권위는 2001년 11월에 출범했다.
◆“혐오표현에 이렇게 무대책인 나라 또 있을까”
인권위가 의뢰한 연구용역보고서는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해외 사례로 “유럽연합 내 20여개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브라질, 콜롬비아 등에서 혐오표현 중 증오선동을 형사처벌하고 있다”라며 “그 외 혐오표현 유형에 대해서도 주요 선진국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재를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혐오표현 규제를 위해선 특히 국가인권기구, 차별시정기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혐오표현 전문가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는 “한국은 혐오표현에 대한 범국가적 차원의 조치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올해 초 펴낸 저서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에서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고 있지 못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그렇다고 정치 지도자, 사회 유력 인사들이 혐오표현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하는 것도 아니다. 일부 언론과 인권단체들이 그 위험성을 알리는 정도”라며 “혐오표현이 차별행위, 증오범죄로 진화했을 때 강력한 조처가 내려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 학교에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홍 교수는 “이름을 알 만한 주요 국가 중 혐오표현에 대해 이렇게 대책 없이 일관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지난 7일 서울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 포스터. |
연구용역보고서에서는 인권위가 하루빨리 혐오표현 개념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것을 권고했다. 보고서는 “혐오표현의 의미가 불명확한 상태에서는 불필요한 논란이 야기된다”며 “무엇이 혐오표현인지를 놓고 소모적 논쟁이 생길 것”이라고 예고했다.
2년 뒤 예고는 현실이 됐다. 지난 7일 서울 혜화역 ‘제3차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에서 터져 나온 “문재인 재기해” 구호를 두고 전문가들조차 혐오표현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재기하다’가 혐오표현에 해당하지 않는 이유를 “소수자 차별과 무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저서에서 “남성이나 기독교도와 같은 (사회적)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라며 “소수자들처럼 차별의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맥락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인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전날 페이스북에 워마드의 ‘태아 훼손 사진’을 언급하며 “제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여성의 남성에 대한 혐오표현은 언제나 정당하며, 혐오표현이 성평등을 앞당긴다’고 주장했던 지식인들”이라며 “인간의 끔찍한 도덕적 파탄을 부추겨 놓고도 반성하지 않는 ‘지성’이야말로 ‘무한 혐오’의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고 맹비난했다.
이동수 기자 samenumbe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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