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올해 개관 5주년을 맞았다. 거대한 우주선으로 불시착한 듯한 DDP는 서울을 넘어 한국의 랜드마크, 세계적인 디자인 허브가 됐다.
세계일보는 DDP를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대표 최경란)과 협업해 ‘서울의 디자인 이야기’를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건축과 디자인, 패션 등 DDP와 연관된 분야별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 본다.
◆디자인, 명사에서 동사로 변화하다
디자인의 본질은 혁신이며 변화다. 이를 위해 디자인은 ‘멋지게 잘 그려내는 미학 관점의 표현 작업’이란 좁은 의미를 넘어, ‘원하는 바를 위해 현재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고민하는 창의적 사고’로 확대되고 있다.
보통 “디자인이 참 멋지네!”라고 할 때는 디자인을 명사로 쓰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사물의 외형, 즉 고급스럽다거나 차별화된 조형 또는 소재에 집중하게 된다. 이 심미적 결과물이 개인 디자이너의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인식돼 그동안 많은 스타 디자이너가 탄생하기도 했다.
디자인을 이해하는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인가를 디자인하다’와 같이 디자인이 동사로 쓰일 때는 결과물만이 아닌 디자인하는 과정까지 모두 포함하게 된다. 어떤 문제에 몰두하는 디자인 방식은 미학적 특성만이 아니라 그 의미와 구조, 기능, 사용하는 경험을 함께 다루는데, 사물에 입히는 외형만이 아닌 사물의 본질적 가치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대상 또한 유형적 제품에 머물지 않고 주변의 여러 환경이나 맥락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지구환경과 생태계를 고려한 디자인, 사회문제 해결 디자인까지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또 무형적인 서비스 등 인간과 사회의 총체적 경험을 광범위하게 다루기 위해 각 분야가 유기적으로 통합돼 연결되고 있다.
◆사용자 중심 혁신을 위한 디자인
이렇게 변화된 디자인은 사용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환경, 서비스 접점 등의 맥락을 재구성해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만들어 낸다. 혁신은 가치 있고 독창적이며 의미 있는 새 제안을 창조하는 것을 가리키며, 제품이나 서비스, 시장, 절차, 비즈니스 모델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공공의 영역이든 기업이든 의미 있는 방식으로 혁신하려면 깊이 내재된 철학을 바탕으로 한 비전이 있어야 하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혁신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혁신은 반드시 위험도 높은 시도나 첨단 기술, 새로운 기술이 아니어도 된다. 사용자의 삶에 작은 가치나 의미를 더해 줄 새로운 결과물이면 충분하다.
혁신 프로세스 초기부터 디자인이 함께한다면 사용자를 중심으로 놓고 문제를 바라보고, 기술을 사용자 중심으로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며, 이해 관계자와 고객을 연결하는 솔루션도 제공한다.
◆통찰과 창의의 ‘더블 다이아몬드’
혁신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 디자인이 사용하는 서비스 디자인 프로세스가 있다. ‘서비스 디자인’(Service design)은 디자인의 가치를 외형적 제품만이 아닌 유·무형의 서비스로 확산해 소비자에게 총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디자인한다. 통찰과 창의를 만들어 내는 이 혁신 프로세스는 ‘더블 다이아몬드’(Double diamond)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용어는 영국의 디자인 기관인 디자인 카운슬(Design Council)이 처음 사용했다.
더블 다이아몬드의 첫 번째 다이아몬드는 사용자의 문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통찰’의 다이아몬드다.
디자이너들이 사용자가 진짜 바라거나 필요한 것을 알게 된다면 보다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정제해 결론에 도달하는 분석적 사고와 사용자에 대한 관찰과 공감으로 문제를 파악하는 디자이너들의 직관적 사고가 더해지면,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통합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감수성과 전략적 사고를 모두 거쳐 통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다이아몬드는 발견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의 다이아몬드다.
사용자에 대한 통찰의 과정 없이는 창의의 과정이 있을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점이 중요하다. 가설을 세우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럴 것이야’라는 가설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사용자와 공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디자인은 확산과 수렴의 다이아몬드 과정을 반복해 최적의 해결책을 만들어 낸다. 디자인은 통합적 사고를 기반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그 통찰을 바탕으로 사용자 중심의 솔루션을 설계하는 것이다.
◆사용자 중심 디자인의 혁신 사례
디자이너는 낙천적인 상상가들이다. 혁신은 상상의 씨앗을 실용적으로 다듬어 추론과 검증을 반복적으로 실행하는 순환 과정을 거치는데, 상상의 씨앗은 ‘만약 이렇게 하면 해결되지 않을까’라는 수많은 낙천적 질문에서 발현된다.
많은 기업들이 기존 모델을 다듬고 경쟁사를 벤치마킹하는 데만 분주했을 때 달리 생각해 업계의 판도를 뒤집은 사례가 있다. 미국의 사우스웨스트항공은 서비스 디자인의 벤치마킹 사례로 꼽힌다. 대형 항공사들이 서로의 사업을 모방하거나 소소하게 다듬고만 있을 때 이 항공사는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비행기 탑승에서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국 다른 항공사처럼 주요 공항을 중심으로 각 지점을 연결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직항 노선을 채택했다. 저렴한 가격과 즉석 예약, 직원들의 친절함을 배가했다.
사우스웨스트항공은 고객들이 기존 시스템에서 느끼는 불편함에 공감해 그 문제를 혁신했고 기존 항공사와 저가 항공사 체제로 항공산업을 재편했다. 지난해 10월 기준 미국 내 전체 여객 수송량 1위란 성적은 바로 서비스를 디자인하고 혁신한 덕분이다. 상상력도 창의력도 이처럼 고객의 문제에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서울 구로구의 고척스카이돔도 서비스 디자인의 성공 사례다. 야구 경기나 콘서트가 진행되고 최대 3만5000명을 수용하는 이 공간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안전하게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인간은 위급 상황에서 뇌 부하를 줄이기 위해 논리적 판단보다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특성이 있다. 이런 점을 디자인에 적용해 ‘안전안심 서비스 디자인’을 하게 됐다.
인간은 비상시 본능적으로 처음 들어온 길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이 있다. 이에 따라 ‘진입한 곳이 곧 출구’란 점을 각인시켜주고, 출구까지 이동하는 바닥면에 화살표와 함께 화재 시 가장 눈에 잘 띄는 노란색을 적용했다. 위급 상황에서도 ‘노란색 바닥만 따라가면 된다’란 기억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긴급 상황 시 무조건 앞사람을 따라가는 추종 본능도 고려해 각각의 출구 위에 ‘대피 리더석’ 총 36석을 마련해 운영할 예정이다. 이들 좌석 앞에는 대피 관련 정보, 행동 요령이 표시된다. 기내 출구 좌석에 앉은 고객이 비상 착륙 시 안내 역할을 하는 방식과 같다. 고척스카이돔은 3만5000명이 빠져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 골든타임이 20분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출구로 나가는 게 중요해 대피 전과 대피 중, 대피 후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안내 방송 시나리오도 같이 디자인했다.
◆미래 디자인의 역할, 서비스 디자인
일본 도요타는 최근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이동성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회사라고 자신들의 정의를 바꿨다. 과거에는 제품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서비스와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것. 비단 자동차 회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 세계는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선진국일수록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무형의 서비스를 디자인하는 서비스 디자인 역시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계와 서비스 접점을 잘 디자인하는 게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다.
앞으로 디자인은 사용자 중심의 통찰과 창의로 미래를 보다 더 가치 있게 바꾸는 일에 함께할 것이다.
이경미 사이픽스(Cyphic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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