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형사립고(자사고) 지정 취소 여부를 두고 교육계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반쪽으로 갈려 갈등이 깊어가고 있다. 한국 사회 판도라의 상자인 ‘입시’를 두고 벌이는 이념적 공방이어서 당국의 정책적 판단 이후에 혼란은 되레 커지는 양상이다. 막바지로 치닫는 자사고 이슈에 맞춰 양측의 공방도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여의도 정치권 못지 않게 거센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이번주 자사고 운명 판가름
21일 교육계에 따르면 교육부는 25일 특목고 등 지정위원회를 열고 상산고에 대한 전북도교육청의 자사고 지정 취소 신청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경기 안산 동산고와 자발적으로 취소 의사를 밝힌 군산 중앙고에 대해서도 함께 심의한다. 지정위원회는 교육부 장관의 동의 여부 결정을 위해 교육청이 제출한 서류를 검토한다. 위원들은 교육부 장관이 위촉하거나 지명한 인사로 꾸려진다. 지정위원회에서 나온 결론을 토대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동의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서울시교육청은 22~24일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학교보건진흥원에서 서울 자사고 지정취소 관련 청문을 개최한다. 청문은 학교명의 가나다순으로 진행된다. 22일 경희고·배재고·세화고, 23일 숭문고·신일고·이대부고, 24일 중앙고·한대부고 순이다. 청문이 종료되면 서울시교육청은 26일쯤 교육부에 자사고 지정취소 동의 요청서를 전달한다는 계획이다. 교육부가 신속 결정 입장을 여러차례 밝힌 만큼 이르면 8월 첫째 주 서울시교육청 결정에 대한 동의 여부를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가 지정취소에 동의한 자사고는 내년부터 일반고로 전환된다.
◆보혁 장외 여론전 격화
여야 국회의원들은 지난주 교육부에 “상산고를 구제해달라”는 내용의 요구서를 제출했다. 정운천 바른미래당 의원의 주도로 여야 국회의원 151명은 지난 18일 ‘상산고 자사고 지정취소 부동의 요구서’를 유 부총리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부동의 요구서에 “(김승환) 전북교육감이 재량권 일탈·남용, 법령 위반, 독단적인 평가 기준 등으로 자사고를 부당하게 평가했다”며 “그 결과 매우 모범적으로 운영돼온 상산고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전북지역 31개 시민·교육단체 등으로 구성된 ‘상산고 자사고 폐지―일반고 전환 전북도민 대책위원회’는 19일 성명을 통해 “민생은 내팽개친 채 상산고 나팔수로 나선 국회의원들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대책위는 “자사고는 말로만 교육의 다양화를 외칠 뿐 실제로는 대입 준비 학원으로 변질했다”며 “서민은 꿈도 꾸지 못하는 높은 학비로 부모의 돈에 의해 아이들의 우열이 결정되고 신분을 세습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 자사고 문제를 두고는 이언주 의원(무소속)과 서울교육청간 설전이 오갔다. 이 의원이 자신의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자사고 폐지’ 제안을 두고 “꼴통 사회주의자에 폭력적인 파시스트”라고 비난하자 서울시교육청이 대변인 명의 논평을 통해 “교육을 사사로운 이해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삼지 말라”고 맞받으면서 공방을 벌였다.
◆수월성 VS 형평성…‘자사고’ 정권따라 롤러코스터
자사고 지정 취소 공방의 이면에는 보수와 진보 진영간 교육 철학 차이가 자리하고 있다. 수월성을 중시하는 보수 진영과 형평성에 무게를 둔 진보 진영이 정면충돌하는 지점이다. 보수 진영은 “다양하고 자율적인 교육”이라며 자사고의 기치를 내걸지만 진보 진영은 “수능 위주의 교과운영, 고교 서열화 조장”으로 맞서고 있다.
보수와 진보 진영간 대립 구도가 선명한 자사고 정책은 정권을 따라 시소를 타듯 오갔다.
자사고는 고교의 자율성을 늘리고, 학생의 선택권을 다양화하기 위해 이명박정부가 2010년 도입한 학교 모델이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공약에서 출발한다. ‘학교 만족 두 배, 사교육 절반’이라는 제목의 교육 공약 내용을 보면 자사고는 “국가의 획일적 통제에서 벗어나 교육과정, 교원 인사, 학사운영 등을 학교가 자유롭게 운영하고, 그 책무성을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에 의해 평가를 받게 하는 사립고교 운영모형”이라고 설명했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내용이 구체화한다.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백서인 ‘성공 그리고 나눔’에 따르면 이명박정부는 학교에 대한 획일적인 규제를 대폭 철폐하고 학교의 제도와 운영을 다양화해 학교 교육의 내실화를 선도하기 위해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한다. 기숙형 공립고 150개, 마이스터고 50개, 자사고 100개 등 300개의 다양화된 고교를 만들어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확대하고, 동시에 농어촌 지역의 고교를 활성화하며, 전문계 고교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자사고가 일반고의 3배 이상 등록금을 내야 하는 만큼 ‘귀족 학교’가 될 것이고, 특수목적고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몰리면서 고교 입시가 과열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자사고 정책을 밀어붙였고, 2010년 이후 전국에서 54개 학교가 자사고로 지정됐다. 이때 고등학교 평준화 문제점 개선을 위해 김대중정부 때 만든 자립형사립고도 자사고로 옷을 갈아입는다. 현재 전국 단위 자사고인 민족사관고, 광양제철고, 포항제철고, 해운대고, 현대청운고, 상산고, 하나고 등이 자립형사립고였다.
박근혜정부는 자사고의 문제점은 인정하면서도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겠다며 자사고 유지와 일반고 육성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다. 그렇지만 2014년 자사고 폐지를 공동공약으로 내건 진보교육감들이 지방선거에서 대거 당선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진보교육감들은 무더기 자사고 지정 취소에 나섰고, 박근혜정부의 교육부는 교육감 재량권 남용 등을 이유로 교육청 결정을 직권취소하며 맞섰다. 또 자사고 취소 때 교육부 장관의 사전 동의를 거치도록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이 사태는 결국 법정 싸움으로 번진 끝에 3년6개월 만인 지난해 7월 교육부 승소로 마무리됐다.
자사고는 그러나 진보진영인 문재인정부가 들어서면서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문재인정부는 대선 과정에서 복잡한 고교 체제 단순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면서 외고와 국제고, 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반고와 특목고, 자사고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동시 실시 등이 추진됐다. 교육부는 2018년 ‘고입 동시 선발’을 시행, 자사고와 일반고의 모집 시기를 합쳤다. 자사고 지원자의 일반고 중복지원도 금지했다. 이 조치에 반발한 자사고들은 헌법소원을 냈고, 결국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중복지원 금지는 유예하고, 동시 선발만 이뤄지게 됐다.
세종=이천종 기자 sky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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