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의자에 앉아 벽면의 그림을 응시한다. 꼼짝하지 않고 그렇게 매일 한 시간을 쳐다보며 그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어떤 사연이 그림속 주인공들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와 아르고스 왕의 딸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교활한 세리포스섬의 왕 폴리데크테스의 명령으로 메두사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길에
해변의 바위에 묶인 한 여인을 발견하는데 그녀가 에티오피아의 왕비 카시오페이아의 딸 안드로메다.
왕비는 자신이 바다의 신들보다 아름답다고 뽐내다 그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샀고
결국 에티오피아에 해일 등 대재앙이 닥친다. 그러자 왕은 딸 안드로메다를 바다괴물 케토스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사연을 들은 페르세우스가 단칼에 그녀를 구하고 아내로 삼는다. 그리스신화 중 가장 스펙터클한 이 스토리는 많은
문학작품과 미술에 등장하는데 남자는 영화 같은 이 스토리에 푹 빠졌나 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체코의 베르사유’ 레드니체-발티체 궁전의 메인홀에 걸린 이 그림은 보는 순간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으며 풍부한 상상력을 발동하게 만든다. 남자는 이 궁전의 마지막 영주. 아내는 매일 이 그림만 쳐다보는 남편을 시기해 그림을 볼 수 없도록 의자를 그림 밑으로 옮겼다. 아내를 존중하던 남자는 차마 의자를 원래 자리로 돌릴 수 없어 그림 반대편 벽에 거울을 달아 의자에 앉아 이 그림을 계속 감상했다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따라가다
체코는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대표적인 해외 여행지다. 지난해 체코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약 41만7000명으로 역대 최다 방문을 기록한 2017년보다 늘었을 정도로 한국 여행객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즐비하고 다양한 항공편이 있어 접근성도 좋다. 무엇보다 가성비가 뛰어나고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대거 보유한 점도 체코로 발길을 이끌게 만든다. 체코는 지난해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2곳을 보유했었는데 이달 초 체코 북서부의 크루쉬노호르지 광산 지역과 클라드루비 나드 라벰의 의전용 말 사육 및 훈련소가 추가로 등재돼 모두 14곳으로 늘었다.
오스트리아 국경지역인 레드니체-발티체 궁은 유럽의 영향력 있는 가문 리히텐슈타인 가의 후손들이 600여년 동안 거주하던 곳으로 프라하의 체스키 크룸로프와 함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3대 궁전 중 하나다. 17∼20세기 레드니체 궁은 영주들이 유행에 따라 건물을 계속 허물고 새로 건축하는데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을 거쳐 1846년 지금의 네오고딕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영국식 조경으로 영지를 하나의 거대한 공원으로 꾸며놓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리히텐슈타인 공국의 카를 1세는 17세기 초 공작 작위를 받은 뒤 발티체 성을 거주지로 삼으면서 레드니체 성을 여름 별장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레드니체성 내부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아주 정교한 목각 인테리어로 꾸며진 계단이 손님을 맞는다. 궁전 곳곳이 19세기의 현란한 나무 양식으로 치장됐는데 서재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은 마치 뱀이 똬리를 틀 듯 생동감 넘치는 디자인이 압권이다.
나무 장식은 대부분 와인을 숙성시키는 오크로 만들어 뒤틀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이런 나무 양식이 대유행했는데 궁 전체를 모두 꾸미려면 보통 20년이 걸렸단다. 하지만 레드니체 성은 오스트리아에서 내로라하는 목각 장인들을 대거 모셔와 불과 7년 만에 이를 완성했다고 하니 당시 리히텐슈타인 가의 재력과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해가 비칠 때 영롱하게 빛나는 지중해의 연한 코발트색과 가문의 문장으로 꾸며진 메인홀의 벽면은 너무나 아름다워 한참을 서 있게 만든다. 레드니체 성은 매해 새로운 곳을 개방하는데 2021년에는 지하 묘지인 카타콤을 개방할 예정이어서 벌써 비상한 관심을 끈다.
인근 발티체 궁은 중부 유럽의 바로크 양식 건물로 현재 국립와인살롱과 기념품점, 카페 등으로 꾸며져 여행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특히 길이 1㎞의 동굴셀러가 장관이며 체코 와인경진대회에서 100위 안에 든 와인들을 시음하고 구매할 수 있다.
#중세 거리로의 시간여행
체스키 크룸로프는 아름다운 중세 유럽의 역사 도시다.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약 5세기 동안 평화롭게 발전했다. 중부 유럽에서도 온전한 건축 유산을 간직하고 과거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으니 체코를 여행하면 반드시 들러야 한다. 독특한 바로크 양식의 극장이 있는 성과 궁전, 굽이굽이 흐르는 블타바강, 다섯 개의 장미 꽃잎이 그려진 문장, 중세 거리와 석조 주택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프라하는 체코를 찾는 이들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명소다. 특히 구시가지와 프라하성을 연결하는 카를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로 꼽힌다. 프라하의 전성기를 주도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4세가 1357년 지은 이 다리에는 30개 성인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니 놓치지 말자. 프라하 성, 성 비투스 성당 등 세계유산에 등록된 많은 건축물들은 대부분 카를 4세 황제 시대에 지어졌다. 중세 말기 이후 많은 교회와 성 덕분에 건축, 예술, 종교분야에서 뛰어난 세계적인 유산과 예술적인 보물을 남겼다.
홀라쇼비체(Holasovice) 역사 마을 보존 지구는 중부 유럽 전통 마을이 완벽하게 보존된 곳이다. 18∼19세기 체코 남부 보헤미아의 전통 주택들이 중세 시대의 도시 배치 방식으로 보존돼 있다. 이번에 새로 지정된 크루쉬노호르지 광산 지역은 체코 북서부 및 독일 남동부에 걸쳐 있는데 중세시대부터 다양한 금속을 채굴하던 곳이다. 1460∼1560년 유럽에서도 가장 중요한 은광으로 이름을 날렸고 혁신적인 광물 가공 및 제련소가 있는 광산 도시는 약 800년 동안 번성했다고 한다.
라베 평원의 슈트르제드니 폴라비에 있는 클라드루비 나드 라벰은 의전을 맡은 말들을 훈련하고 사육하던 곳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행사에 사용되던 클라드루버라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토착 품종의 말을 사육하고 훈련하던 유럽 최고의 말 사육 기관으로 현재도 약 500마리가 훈련받고 있다.
프라하·모라비아(체코)=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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