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금을 뿌린 듯 봉평을 물들인 메밀꽃
평창으로 가는 길에 아주 오래전 읽은 책 하나를 펼쳐본다.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 허 생원, 조 선달, 동이가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가는 팔십리 길의 묘사는 시어를 풀어 놓은 듯 빼어나다. 한국 서정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까닭이다. 스토리도 흥미진진. 물방앗간서 만나 딱 하룻밤 사랑을 나눈 성 서방네 처녀. 자신처럼 왼손잡이인 동이가 그때 잉태된 그녀의 아들이라는 반전. 더구나 그녀는 혼자 제천에 살고 있다.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라며 마침표를 찍는 열린 결말. 과연 허 생원은 그녀를 만나게 될까. 빨리 다음 편을 보고 싶어 못 견디게 만드는 드라마 같다.
이번 주말 봉평은 이효석의 소설 속 공간으로 변신한다.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산허리를 뒤덮고 있어 숨이 막힐 지경인 달빛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봉평이 고향인 가산 이효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효석문화마을의 하얀 메밀꽃밭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평창효석문화제는 오는 7일부터 15일까지 열린다. 축제가 시작되면 봉평은 인파로 가득 찬다. 이를 피해 지난주 봉평을 찾았는데 너무 성급했나보다. 아직 메일꽃은 반도 피지 않았다. 더구나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옷만 흠뻑 젖었다. 그래도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니 물방울을 머금은 메밀꽃이 생기로 가득하며 하얀색이 제대로 살아난다. 비 온 뒤 메밀꽃은 더욱 빠르게 피어나니 이번 주말부터는 활짝 핀 메밀꽃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축제기간에는 평창역에서 행사장까지 셔틀버스가 운행되는데 사전예약을 하면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다. 자연마당에서 나귀를 타거나 열차를 타고 메밀꽃밭을 둘러볼 수 있으며, 꽃밭 사이로 난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소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가산공원에는 허 생원 등 장돌뱅이들이 자주 들렀던 주막 충주집이 꾸며져 있고, 흥정천 다리 건너에는 허 생원과 성씨 처녀가 사랑을 나눈 물레방앗간도 있다. 효석 문학숲 공원에는 소설 속 장면을 재현한 쉼터들이 곳곳에 배치된 소설로가 500m가량 조성됐다. 또 2.7km의 등산로가 연결돼 있는데 숲 속 습지에는 희귀생물들을 만나게 된다.
인근의 이효석 문학관도 강추.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연대기별로 살펴볼 수 있어서다. 그가 사용한 유품, 초간본 책, 작품이 실린 잡지, 신문 등 귀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 소설 속 주요 장면들 재현한 미니어처들도 만날수 있다. 문학관 앞 도로인 이효석길을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널찍한 논을 거느린 이효석 생가가 나온다. 이효석이 보통학교에 다니기 전 유년 시절에 살던 곳으로 집 앞뒤로 가득한 메밀꽃이 장관이다. 주 행사장 무대가 차려진 전통마당과 예술촌 등에서는 버스킹 공연과 영화 상영을 비롯해 색소폰과 퓨전난타, 소래국악예술원 공연, 드림 오브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도 마련돼 주말 가족 나들이로 안성맞춤이다.
#봉평장 메밀국수 먹고 백일홍 축제도 즐겨볼까
소설 속 무대인 봉평장은 100년동안 이어지고 있는데 매달 끝자리가 2일과 7일인 날에 열리는 오일장에는 주민들과 여행자들이 몰리며 활기로 가득 찬다. 봉평에 왔으니 메밀국수를 꼭 맛봐야 한다. 봉평장에서는 손맛 좋은 주인장들이 펼쳐내는 다소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메밀국수를 맛볼 수 있다. 메밀음식 거리에서는 30여곳의 메밀전문 식당이 밀집돼 있는데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부침, 메밀전병 등 다양한 메밀 음식을 서로 다른 조리법으로 내어 놓고 있어 어디를 들어가도 좋다.
음식거리와 좀 떨어져 있지만 미가연은 봉평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메밀음식 맛집이다. 메밀요리 1호 명인 오숙희씨가 만드는데, 일반 단메밀보다 알갱이가 아주 작은 쓴메밀로 국수를 뽑아내는 점이 특징이다. 쓴메밀을 쓰는 식당은 전국에서 이곳이 유일한데, 오 대표는 “쓴메밀에는 눈에 좋은 루테인이 단메밀보다 70배가 많고 쓴맛에서 진정한 자연 단맛이 우러난다”고 설명한다. 들깨와 들기름에 버무린 메밀싹 묵무침을 꼭 맛봐야 한다. 메밀의 은은한 향과 들기름 향이 찰떡궁합처럼 어우러지며 식욕을 돋운다. 메밀싹과 잘게 썬 절임고추를 얹어 먹는 메밀전병도 깊은 맛이 우러난다.
이대팔 육회 비빔국수는 면 위에 무, 메밀싹과 신선한 육회가 한가득 얹어 나와 한 그릇 비우면 속이 든든하다. 오 대표는 ‘일주일에 두번 이상 먹으면 아주 팔팔하게 오래 산다’는 뜻을 담아 국수 이름을 ‘이대팔’로 지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면은 쓴메밀 70%에 일반메밀 30%를 섞어 만든다. 육수는 한약재, 양지머리, 황태를 넣고 푹 고아 사과, 배, 아카시아꿀, 메실 엑기스로 맛을 내는데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아 화려하지는 않지만 깊은 맛이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경기도 용인 고기리 장원막국수, 여주 천서리 홍원막국수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메밀국수집으로 엄지척이다.
올해 효석문화제 기간에는 다른 볼 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 효석문화제보다 하루 앞선 6일부터 15일까지 평창백일홍축제가 펼쳐진다. 평창읍 평창강 제방길 주변에 백일홍 1000만송이를 심었는데 벌써 알록달록 다양한 백일홍이 하늘하늘 만개해 장관을 이루고 있다. 100일 동안 붉게 핀다는 백일홍의 꽃말은 ‘행복’. 백일홍이 가득한 꽃길을 걷다보면 이른 가을 정취에 흠뻑 취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평창=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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