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리브해 섬나라 앤티가 바부다에 사는 코린 제럴드와 그의 가족은 2017년 9월 대형 허리케인 ‘어마’에 집을 잃었다. 제럴드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인근 섬으로 이주해 살고 있지만, 그의 남편은 바부다섬에 홀로 남아 섬 재건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당시 최대 풍속이 시속 250㎞에 달하는 어마에 카리브해에서 2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제럴드 가족이 살고 있던 바부다섬 전체 건물의 90% 이상이 파손됐다.
#2. 태평양 섬나라 마셜제도에 살고 있는 17살 샬럿 잭은 이 섬의 마지막 세대다. 어릴 적 뛰어놀던 집 앞마당은 바다로 변했고, 폭우로 해수면이 높아지면 집 안까지 바닷물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미 인구 3분의 1이 마셜제도를 떠났고 남아 있는 5만여 주민 중 절반 이상은 24살 이하다. 샬럿은 해외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쯤 자신의 나라가 통째로 사라져 있을 것을 걱정하고 있다.
악화하는 기후변화로 삶의 터전을 잃는 ‘환경난민’이 늘어나고 있다. 빈민구호단체인 옥스팜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홍수와 사이클론(열대성 폭풍), 산불 등 기후변화가 유발한 자연재해로 매년 2000만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는 화산 폭발이나 지진으로 발생한 이재민 수의 7배, 내전 등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이재민 수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 10년간 이재민 및 난민이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이 전쟁이 아닌 기후변화라는 지적이다. 환경난민은 사막화, 가뭄·홍수·해일 등 자연현상과 인위적 생태계 파괴 등 환경적 요인으로 고향을 떠나는 새로운 형태의 난민을 지칭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1998년에 이미 전쟁난민 수를 넘어선 환경난민 수는 오는 2050년에 최대 10억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30년 후면 전세계 인구의 10%가 환경난민이 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 자연재해 유발
기후변화 위협을 일찌감치 몸소 경험하고 있는 곳은 작은 섬나라들이다. 지구온난화로 수온이 상승해 빙하 감소와 해수 팽창이 일어나고 다시 온난화를 가속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해수면 상승이 빨라지고 있다.
남태평양의 투발루는 매년 5mm씩 바다에 잠겨 앞으로 40년 이내에 모든 국토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했다. 이미 바닷물이 지반을 잠식해 곡식 경작과 식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 10만명의 키리바시 역시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33개 섬 중 2개 섬이 1999년에 물에 잠겼다. 매년 1㎝씩 상승하는 해수면으로 이번 세기 안에 남은 섬이 모두 가라앉을 것으로 예측된다.
섬나라가 아니더라도 세계 인구의 40%가량이 해안으로부터 100㎞ 이내, 1억명 정도는 해발고도 1m 이내 지역에 살고 있어 해수면 상승은 인간의 거주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0년간 지구 평균기온은 섭씨 0.6도 상승했는데, 전문가들은 지금보다 기온이 4도 이상 상승하면 대부분의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지금보다 60m나 더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어느 국가도 수몰 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수준이다.
지구온난화가 야기하는 홍수와 가뭄도 난민을 야기하는 심각한 자연재해다. 일반적으로 대기 기온이 상승하면 더 많은 수증기를 함유하게 되고 홍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뭄 증가도 기온 상승으로 건조해진 토양이 늘어난 강수량에도 이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열대몬순기후로 연간 2500mm 강수량을 기록했던 미얀마 중부지역은 현재 극심한 사막화로 농촌 인구 80% 이상이 빈곤선 이하 생활을 하는 것도 이 같은 기후변화 결과로 해석된다. 서아프리카 사헬지역에서는 사막이 남진해 초원과 농토가 황폐해져 20여만명이 이주했다. 아프리카 케냐는 전국적으로 우기가 짧아지고 가뭄이 심해져 식량 부족이 빈번해졌다. 식수와 가축, 목장 등에 사용되는 물이 부족해져 환경난민 350만명이 발생하기도 했다.
◆선진국, 환경난민에 대한 ‘부채’ 갚아야
기후변화에 따른 위험 발생은 선진국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은 가난한 국가들에 집중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기후변화에 대처할 기반 시설이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제도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피해를 더욱 키운다.
옥스팜은 2008년부터 2018년까지 기후변화에 따른 이재민 발생 상위 10개국 중 7개국이 쿠바와 도미니카공화국, 투발루 등 개발도상국의 작은 섬나라에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비정부기구인 국내난민감시센터(IDMC)의 같은 기간 자료에 따르면 작은 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기후변화 악화로 이재민이 될 가능성이 유럽보다 150배나 높았다. 이에 대해 옥스팜은 보고서에서 “기후 위기로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국가들을 위한 복구 프로그램에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촉구했다. 온실가스 최대 배출국인 중국과 미국 등 선진국이 전세계 환경난민에 대한 ‘생태적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름의 노력에도 지난 10년간 중국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은 3배 가까이 늘었고, 현재 세계 총량의 30%가량이 중국에서 나온다.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미국도 19세기 이후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국가이자, 1인당 배출량으로는 여전히 세계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환경난민의 ‘난민 지위’ 인정론 대두
환경난민은 인종, 종교, 민족,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제사회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연재해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은 대부분 아직 자국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피해를 본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안전한 삶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으려는 난민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들어 UNHCR가 이들에 대한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개별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아 언제든 본국으로 돌려보내질 수 있는 처지다.
2013년 키리바시 출신의 한 남성은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을 이유로 뉴질랜드에 난민 자격을 신청했다. 키리바시는 당시 바닷물이 자주 범람해 작물들이 죽고 식수원이 오염됐다. 한정된 지역에 인구가 몰리며 주민 간 갈등도 본격화하던 때였다. 그는 기후변화 피해로 키리바시의 법과 질서가 와해될 것이라며 뉴질랜드 당국에 난민 신청 사유를 밝혔다.
뉴질랜드 재판부는 그러나 집단적인 위험이 아니라 한 개인의 위험만 고려할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그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에서도 환경난민을 국제법·국내법상 보호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이 남성은 결국 키리바시로 강제 추방됐다. 이에 기후변화에 책임이 있는 선진국이 환경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1980년대 이후 환경난민의 문제가 대두됐음에도 국제사회에서 이들이 난민으로 공식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기후변화를 일으킨 선진국들의 책임 회피라는 이유에서다.
◆기후변화, 분쟁과 폭력의 ‘불씨’
‘전쟁난민’과 환경난민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기후변화는 그 자체로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만, 분쟁과 폭력의 불씨가 되거나 분쟁을 더욱 증폭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40만명 이상 사망자를 낸 ‘다르푸르 분쟁’은 가뭄과 사막화에서 촉발됐다. 이 분쟁으로 발생한 난민들은 ‘전쟁 난민’으로 정의됐지만 근본 원인에는 기후변화로 식수원이 고갈되고 농경지가 감소한 데 있었다. 이에 흑인계 무슬림(이슬람교도)인 푸르족과 아랍계 무슬림이 토지 문제를 놓고 대립했고, 독재자 오마르 바시르가 아랍 민병대 편을 들며 푸르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다르푸르 분쟁을 지역 내 분쟁으로만 이해한다면 근본적인 해결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기후변화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방책을 세워야 분쟁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지속하고 있는 시리아 내전 원인으로 당시 이 지역을 덮친 극심한 가뭄이 꼽힌다. 내전의 직접적 계기는 정부가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부 시위대가 정부군에 맞서 무장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900년 만의 최악 가뭄이 농민들로 하여금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몰리게 했다는 분석이다. 필리포 그란디 UNHCR 대표는 “난민은 자연재해만으로 발생할 수 있고, 기후변화와 분쟁 사태의 상호작용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며 어떤 경우에서든 국제적 보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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