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밀집지구들에서는 자선단체의 식량 배급을 받으러 몰려든 수천명이 십수 시간을 기다리는 풍경이 이어지고 있다. 찬 밤을 지새워야 하지만 가족들에게 갖다줄 음식이 생겼다는 기쁨에 다른 모든 고통은 사라진다. 2일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주민들에게 나뉜 꾸러미 안에는 쌀 10㎏, 옥수숫가루, 우유상자, 어류와 콩 통조림, 식용유 2L 등이 들어 있었다고 현지 매체는 전했다. 전날부터 의무화된 규정에 따라 마스크 쓴 사람들은 눈에 띄었지만 기다란 줄 곳곳에서 다닥다닥 붙어선 이들이 포착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가 유독 더 힘든 사람들이 있다. 사회취약계층에게 감염병의 대유행은 설상가상의 위기다. 코로나19로 인해 사상 최대의 기근 위험에 직면한 나라들에서는 생지옥이 연출되고 있다. 이들은 “배 고파서 죽느니 코로나19에 걸려 죽겠다”고 토로한다. 지난달 말 CNN이 만난 한 나이지리아 시민은 이렇게 말하며 “군경이 도로에 나와 우리를 감시하든 죽이든 무슨 상관인가. 나가서 먹을 것을 찾을 수 있다면 나갈 것이다. 사람들은 그 정도로 굶주려 있다”고 전했다.
◆세계 곳곳 ‘기근 팬데믹’ 공포 눈앞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코로나19를 계기로 ‘기근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달 21일 WFP가 발표한 ‘식량위기에 대한 제4차 연례 글로벌 보고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빈곤국들을 중심으로 2억65000만명이 굶주림에 처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2019년 말에 비해 2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데이비드 비슬리 WFP 사무총장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개발도상국 30개국 이상이 광범위한 기근을 경험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미 이 중 10개국에서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WFP는 특히 더 큰 위험에 노출된 개발도상국 5개 나라를 꼽았다. 예멘, 콩고민주공화국, 베네수엘라, 남수단,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적인 기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들 국가는 기본 보건·위생시설이 부족한 것은 물론 정확한 감염자 통계와 충분한 검사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일거리, 먹거리마저 끊기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아랍권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예멘은 5년 넘는 내전을 겪으며 심각하게 황폐화됐다. 아리프 후세인 WFP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리서치 책임자는 BBC에 “전쟁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취약해졌다. 2016년 300만∼400만명의 사람들을 지원하던 수준에서 지금은 이 숫자가 1200만명까지 급증했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예멘 내 보건시스템이 취약한 만큼 질병 역시 빠르게 확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가운데 예멘 내 후티 반군은 이달 초부터 구호품 배달을 방해하고 있다. WFP는 후티군 통제지역에 대한 원조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애꿎은 국민의 피해만 커지게 됐다.
WFP는 콩고 일부 지역에서 25년 만에 가장 큰 기근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미 인구 15% 이상인 3000만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로 분류돼 있었다. 후세인 수석은 코로나 여파가 닥쳐올 콩고에서 앞으로 3개월 동안 이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려면 20억달러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는 지난해 1월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는 등 심각한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와중에 코로나19와 맞닥뜨렸다. 경제도 어려운데 감염병까지 겹치면서 더 많은 국민이 조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는 콜롬비아 등 이웃국가에도 큰 보건 위협이다. 현재 480만명의 국민이 베네수엘라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보건 근로자도 많아 감염병 대처에 어려움이 악화할 것으로 우려된다.
인구 60%가 매일 먹을 음식을 찾지 못해 허덕이는 남수단에도 코로나19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남수단은 2011년 독립한 지 2년 만에 다시 격렬한 내전에 휘말리며 망가졌는데,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 최악의 기근 상태에 빠졌다고 WFP는 전했다. 올 초 아프리카 전역의 농작물을 파괴한 메뚜기떼가 남수단을 휩쓸고 간 악재도 있어 타격이 더욱 크다. 산유국인 남수단은 세계에서 원유 의존도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인 탓에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유가 폭락에도 경제적 피해가 막심할 것으로 관측된다.
2001년부터 미국과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도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은 국가다. WFP에 따르면 전쟁 이후 인구 절반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이곳에서 1100만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로 분류돼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진 사례가 확인된 것만 1000건이 넘는다. 취약한 보건체계와 제한적인 검사 역량을 고려하면 실제 확진자 수는 이보다 많을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확산이 심각했던 이란에서 지난 3월 15만명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국적 이민자가 재입국하면서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취약국가 지원 없으면 최대 10억명 감염 위험”
바이러스 확산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팬데믹의 시대에 일부 국가의 문제는 곧 지구촌 전체의 문제다. 국제구호위원회(IRC)는 세계 곳곳에 분포한 취약국가에 대한 재정적·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달 28일 IRC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긴급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전 세계 코로나19 감염자가 5억∼10억명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된다. 전 세계 인구 78억명의 13%에 달하는 규모다.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 내정이 불안한 국가를 중심으로 코로나19 대유행을 막기 위한 자금 지원이 제때 되지 않는다면 300만명이 사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데이비드 밀리밴드 IRC 회장은 “보고서 추산치를 보고 전 세계가 경각심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며 “이런 나라들은 아직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강조했다.
현재 개발도상국들의 코로나19 감염률이나 사망자 수가 상대적으로 낮게 나오는 것은 진단 능력이 극도로 낮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설상가상 의료장비도 턱없이 부족하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는 인공호흡기가 100만명당 10개도 안 되고, 나이지리아는 0.8개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정에 고립’… 여성·아동 등 피해도 극대화
정치적, 경제적 고난이 극심한 국가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정에 고립된 여성, 아동 등 취약계층의 피해 또한 심각하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자가격리를 시행하면서 가족 모두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고, 가정폭력 증가로 이어졌다.
유엔은 가난한 나라나 작은 집에 사는 여성일수록 가정폭력을 신고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고 경고했다. 유엔여성기구 품질레 음람보응쿠카 총재는 “가정폭력 취약 여성을 돌보는 복지사들을 위한 긴급자금을 국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영국과 같은 나라가 코로나19 사태로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눈에 띄게 느는 것과는 반대로 개발도상국에서는 신고 건수가 줄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됐다. 취약 계층 여성이 가해자와 함께 생활하는 작은 공간에서 안전하게 신고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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