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 후보의 민주적 선출’을 강조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적용된 21대 총선에서도 ‘깜깜이 비례대표 심사’ 관행이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1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출한 ‘21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자 추천을 위한 회의록’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연합정당인 더불어시민당(더시민)은 ‘정체성·의정활동력·전문성·기여도·도덕성’을 비례대표 후보 심사기준이라고 명시했을 뿐 비례대표 후보 순번을 결정한 사유와 논의 과정은 회의록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더시민은 지난 3월23일 후보자심사위원회의에서 113명의 비례대표 후보자를 심사해 35명을 최고위원회의에 후보자로 추천했고 최고위원회는 같은 날 회의를 열어 비례대표 후보 순번을 결정했다. 하루 사이 부적격 심사와 후보 순번 결정이 마무리됐지만 회의록에서는 개별 후보에 대한 심사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더시민이 최근 허위사실공표·업무방해·부동산 명의신탁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양정숙 당선인 사례도 이런 불투명한 비례대표 심사 관행이 빚은 참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래통합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한국당)의 경우에도 통합당 황교안 대표가 개입해 한국당의 비례대표 순위를 흔들었지만 회의록에서는 최고위원회의 의결과 대의원 투표 결과만 담겼을 뿐 순번이 바뀐 사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민주당 등 범여권 ‘4+1 협의체’는 지난해 12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비례대표 후보 추천절차 기준과 선출 과정을 담은 회의록 제출을 의무화하는 내용도 함께 개정안에 담았지만, 비례의석 47석 중 39석을 확보한 한국당·더시민·국민의당은 대의원·당원 투표 과정만 기록했을 뿐 비례대표 후보 순번을 결정한 정무적인 판단은 기록하지 않았다. 비례대표 후보를 공천한 35개 정당 중 22곳이 비례대표 후보자 순번을 깜깜이로 결정한 뒤 대의원·당원 투표로 찬반 투표를 진행해 비례대표 명부를 확정했다. 개별 후보자 득표율에 따라 순번을 결정한 정당은 정의당·열린민주당 등 13개 정당에 그쳤다.
선관위는 후보자 심사과정, 투표방법·결과(선거인단 구성 포함), 후보자 결정사항 등을 명시한 회의록 제출을 형식적 요건으로만 제시해 정당들의 이 같은 불투명한 비례대표 심사를 방조했다는 비판이다.
회의록과 추천절차 기준 공개 등을 통해 비례대표 선출 과정의 투명성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선관위가 심사과정에서 형식논리에 치중하는 바람에 깜깜이 비례대표 선출을 제도적으로 방조했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후보자 등록 마감일인 지난 3월 27일에 서류를 제출한 한국당·더시민 등 29개 정당의 심사를 9시간 만에 끝냈다. 각 당에서 미리 제출한 당헌·당규와 공천 심사 회의록을 대조, 후보자들의 필수 제출 서류가 제출됐는지 등만 살피는 수준에서 심사가 끝났다. 비례대표 후보를 낸 35개 정당 모두 선관위의 서류심사를 통과해 비례대표 후보 기호를 받았다.
선관위 관계자는 “바뀐 공직선거법에 따라 요건을 안내하고 그에 맞춰 심사했다. 선거인단의 투표를 거친 경우 법에서 정한 요건은 갖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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