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
갑자기 잠적했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숨진 채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박 시장은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다 정치권에 진입한 이후 최초로 서울시장 3선 고지를 밟으며 여권의 대권 잠룡이 될 만큼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됐다. 최근까지도 서울지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진두지휘하면서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 등 국가적 이슈를 제시하고 서울의 미래 구상을 발표하는 등 대권 도전 의지를 피력하며 의욕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 때문에 갑작스러운 극단적 선택을 두고 ‘박원순이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그는 유서에서도 ‘가족 등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고 할 뿐 무슨 이유에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서울시 안팎에서는 전에 함께 일했던 여직원이 그를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사건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박 시장은 인권변호사 출신답게 평소 인권을 중시하고 성차별 등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소신을 밝혔다. 그런 만큼 성추문 의혹 사건이 불거질 경우 여론 악화는 물론 가족과 지지층의 실망감, 정치적 사망선고 등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박 시장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며 성폭력 사건에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 중 하나도 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맡으면서부터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성희롱이 범죄임을 인식시킨 사건으로 꼽힌다. 공동 변호인단 중 한 명이었던 그는 이 소송을 주도해 6년 만에 피해 여성의 승소를 이끌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시장에 취임한 후에도 그는 성평등과 여성 관련 정책을 강조하며 여성과 인권 문제에 특화된 시장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전국 지자체 최초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지난해에는 성평등 문제 등에 관해 시장을 보좌하는 특별 직위인 ‘젠더특보’까지 신설했다.
특히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선 늘 ‘피해자 주의’를 앞세웠다. 그는 2018년 5월 서울시장 선거 당시 캠프 자원봉사자들에게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면서 “성희롱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때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희롱, 성폭력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같은 해 안희정 전 충남지사 등에 대한 ‘미투’ 폭로가 이어질 당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여성들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며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미투 운동은 용기 있는 영웅들의 행동”이라며 “영웅들의 의지만 있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연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추행 혐의로 피소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많은 국민이 충격을 받은 것도 박 시장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게 평가해온 것과 무관치 않다.
그는 여직원이 고소장을 제출한 지난 8일 저녁 가까운 참모진들과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추행 의혹 사건이 공론화하면 거센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어서다. 그러고는 다음날 연락을 끊은 채 잠적했다. 의혹이 사실일 경우 잘못을 사과하고 시장직에서 물러난 뒤 합당한 처벌을 받는 수준을 넘어 자신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압박감이 컸던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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