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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건물과 시대의 기록은 사회상의 바탕”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0-08-17 11:00:00 수정 : 2020-08-16 19: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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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아파트 안에는 사람이 산다’
회현시범아파트를 그린 작품. 아파트의 중간층에서 튀어나온 고가 다리에서 기형적인 변형과 발전이 느껴진다. ‘회현동기념비 1’(2005) 정재호

◆서울에서의 집, 서울에서의 아파트, 서울에서의 삶

연일 내리는 비에 저녁이면 꼼짝없이 집에 머무르는 일주일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개천이 산책로를 넘어선 것을 보니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보고 싶은 책과 영화 목록을 만들었다. 그것을 하나씩 눈앞에 펼치고 나면 무서운 빗소리에도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왔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된 작품 중에는 영화 ‘소공녀’도 있었다. ‘소공녀’는 전고운 감독이 2018년 개봉한 영화다. 개봉 당시 국내외 영화제에서 소개한 이후 팬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십 대 후반 또는 삼십 대 초반인 것 같은 ‘미소’다.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궁핍하게 생계를 이어간다. 그래도 좋아하는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만 있으면 충분히 행복을 느낀다. 그런 미소에게 위스키 가격, 담배 가격, 그리고 월세가 차례대로 오르는 일이 발생한다. 미소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어 결국 월세로 살던 집을 포기하고 길로 나선다. 대학 시절 밴드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게 되는 이유다.

영화의 중간중간에는 되감기를 눌러 다시 듣게 되는 대사들이 있다. 부모님 댁일지언정 집이 있는 자기에게 대뜸 시집오라는 친구에게 미소가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고 외치는 부분이나 결혼하며 무리해 집을 마련했지만 이혼한 친구가 “못 벗어나. 집이 아니라 감옥이야. 이 집 한 달 대출 이자가 얼마인 줄 알아? 30년 동안 내야 이 집이 내 꺼가 돼”라며 펑펑 우는 장면의 말들이다. 대사를 되뇌며 ‘서울에서의 집, 서울에서의 아파트, 서울에서의 삶’을 생각하니 정재호의 작품이 떠오른다.

◆정재호가 그리는 장소와 시간

정재호(1971)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원 시절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에 감명받아 도시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작가는 운전하며 자주 지나다니던 길이 있었다. 길을 지나 터널을 지나기 전에는 그 위로 오래된 아파트가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아파트는 낯선 모습으로 변한 채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차를 도로 한쪽에 세워두고 아파트를 향해 산길을 걸었다. 청운동 시민아파트가 강북 뉴타운 재개발을 위해 철거를 앞두고 빈 건물이 되어있었다. 그는 30년간 사람들의 삶을 담았던 이 아파트를 그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작가’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낸 아파트 연작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정재호는 다양한 아파트 연작을 그려 선보였다. 1970년대 생인 자신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진 근대화 시기의 아파트에 특히 집중했다. 그곳에 남아있는 삶의 체취에 공감하고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 연작들을 통해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지어진 아파트들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청운시민아파트, 수색아파트, 대광맨션아파트, 중산시범아파트, 금화시민아파트, 안암맨션이 대상이 되었다. ‘청운시민아파트’(2004), ‘오래된 아파트’(2005), ‘황홀한 건축’(2007) 등의 전시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8’ 설치 장면. 정재호

2009년부터는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 그리기 시작했다. 낡은 건물에 관한 관심이 ‘이 건물이 세워진 때 도시의 모습은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끌어낸 것이다.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과 역사로 그림 소재의 범위가 확대했다. 그 시절의 사물과 사건의 사진 기록을 찾아 모티브로 삼았다. 일상의 일부였던 유선 전화기, 타자기부터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 동양 최대 선인체육관까지 그렸다. ‘아버지의 날’(2009), ‘혹성’(2011), ‘먼지의 날들’(2014)을 통해 이 작품들을 선보였다.

2018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올랐다. 선정자를 정하는 전시에서 근대화를 위한 국가, 사회적 발전 메커니즘이 도시 풍경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온 우리의 의식에 깊게 각인되어 있음을 보여줬다. 개발도상국이 국민에게 과학기술이 이룰 밝은 미래를 꿈꾸도록 권장했다는 사실도 제시했다. 도심 속 건축물, 정부 간행물, 신문 기사 등을 회화로 재현했다. 1976년의 공상과학 만화 ‘요철 발명왕’ 속 로켓도 제작했다. 그동안의 작업에서 그려온 장소와 시간의 축이 교차하는 자리였다.

◆오래된 도시와 그 안의 아파트

정재호는 종이 또는 한지에 먹과 아크릴릭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동양화에서 사용하는 전통 매체를 동시대미술에 효과적으로 적용한다. 이러한 그의 작품을 두고 김학량 큐레이터는 전통 회화 매체를 쓰면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통해 도시와 도시 삶에 뛰어든 거의 첫 화가라고 쓰기도 했다. 정재호는 아파트를 그리기 위해 그 장소를 방문해 구체적인 실존의 주제로 다룬다. 즉 문인화에서 작가 내면의 정신성에 비중을 두는 것과 달리 객관적 사실에 주목한다. 새로운 안목과 시대정신을 가지고 독립된 회화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동양화 매체를 함께 사용해 그는 세필로 찬찬하고 세밀하게 그린다. 벽면의 오래된 얼룩과 찌든 때까지도 시간을 들여 묘사해낸다. 그림 가까이 얼굴을 대고 그 디테일을 하나씩 살펴보면 감탄이 터진다. 그 건물을 매일 청소하는 사람보다 더 구석구석을 세세히 알 것 같다. 특히 건물 전면, 파사드를 화면에 가득 채운 그림을 멀리서 보면 사진과 같다. 이러한 노동집약적 작업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현실에 다가가기다. 그는 회화로 현실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성찰하고 고민한다.

세운상가에서 내려다본 서울 풍경을 그린 작품. 하늘에 떠 있는 로켓이 서울을 비현실적인 장소로 만든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난장이의 공’(2018) 정재호

‘난장이의 공’(2018)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제목을 따왔다. 산업화시대 한국의 살풍경을 담은 소설이다. 1970년대에 근대화된 복합 상가로 지어진 세운 상가에서 내려본 서울 시내의 풍경을 그렸다. 청계천과 동대문 주변의 남루한 옥상 풍경들 사이로 두산타워가 보인다. 이 건물들이 만들어낸 스카이라인 위의 회색 하늘에는 난데없이 로켓이 떠 있다. 이 로켓의 등장은 사실적인 풍경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모하게 만든다. 결국, 이 풍경은 미래에 대한 발전과 호기심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사회, 정체되어 있는 사회의 모습이다.

이 풍경과 같은 도시 안에 서 있을 ‘회현동 기념비 1’(2005)은 회현시범아파트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의 작품이 자주 그러하듯 화면을 꽉 채운 아파트는 즉물적 대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다가온 아파트는 페인트의 갈라짐과 아파트의 중간층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고가 다리를 가졌다. 상상 속의 건물 같지만, 이곳은 여전히 남산 자락에 서 있다. 그리고 작품 하단 장독대와 창문 속 물건들이 보여주듯 그곳에는 여전히 삶이 있다.

◆아파트 안에는 사람이 산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도 미소는 머물 곳은 있지만, 여전히 집은 없다. 여기서 집은 단단한 콘크리트로 지은 건축물을 뜻한다. 경제와 정치의 수단처럼 전락한 것같이 보이는 집을 얻기란 참 어렵다. 정재호의 작품이 말하듯 그 안에는 사람이 살고 삶이 존재하는데 그 본래의 목적은 요즘 잘 보이지 않는다.

정재호가 오래된 아파트를 그리다 그 아파트가 탄생한 시대를 소환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거나 기억하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오래된 건물과 시대의 기록을 오늘날 잔존하는 사회상의 바탕으로 본다. 현재는 항상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위에 있다. 정재호의 시대 소환은 아마 이러한 흐름 위에서 현재를 더 명확히 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 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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