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제주 화가·민중미술 작가로 유명
4·3항쟁 겪은 부친이 이름 특이하게 지어
첫 개인전 때 “삶 자체·공존 울림 최상 가치”
해녀 생존 투쟁·항일운동 발전 다룬 소설
‘바람 타는 섬’ 연재 삽화 그리며 제주 공부
삽화 마친 후 ‘4·3’ 담은 작품 50여점 전시
제주서 일어난 학살, 육지에 알린 계기 돼
전시회 후 낙향, 30여년 제주의 자연 찾아
‘4·3’ 연작은 사실적, 자연 그림은 추상적
경험한 본질과 거기서 온 깨달음 화폭에
◆강요배 예술 산문, 풍경의 깊이
9월이 되고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화가 강요배가 산문집을 출간했다는 것이다. 책 안에는 작가가 평생 그린 2000여점의 그림과 그림 속뜻을 표현한 글들이 들어 있다.
그의 글을 작가 노트로 만날 때마다 감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에는 항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었다. 여러 번 생각하고,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고, 글을 다듬고 또 다듬었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작가가 글에 담고자 한 요체(要諦)가 그대로 전해졌다. 이런 강요배의 글을 책 한 권 가득 만날 생각을 하니 기쁜 마음이 들었다.
작가는 이 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떻든 여기 한 권의 글 모음이 있다. 내 인생 45년간의 생각들이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에 쓰인, 많지 않은 글들이다. 한데 모인 글을 보니 살아온 시간에 따라, 내가 여러 사람의 나로 나뉘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이 든 내가 청장년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젊은 나는 미숙했으나 지금의 나보다 먼저 살았다. 젊은 나들이 있었기에 뒤따르는 지금의 내가 있다. 또 달리 보면,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어린 나를 속에 안고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이를 겹겹으로 둘러싸 온 인격체가 지금의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기에 지금의 나는 젊은 나들을 긍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든 나쁘든, 한 화가의 인생에서 펼쳐진, 생각의 여로가 투명 구슬 속처럼 환히 들여다보이는 결과물이 나왔다. 감사하다.”
◆제주 화가 강요배의 삶의 정수를 찾아가는 그림
강요배는 제주 화가 그리고 민중미술 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강요배의 이름과 관련해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강요배의 아버지는 제주 4·3항쟁을 몸소 겪으며 잔인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그중 하나는 토벌대가 빨갱이라는 명목 아래 사람들을 색출, 처형한 일이었다. 색출당한 사람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역시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함께 목숨을 잃었다. 강요배의 아버지는 그 참담함을 지켜보며 자식 이름은 순이, 철이와 달리 특이하게 짓기로 마음먹었다. 요나라 요, 북돋을 배(培)를 써서 요배라고 지은 이유다.
강요배는 어린 시절 마을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빌려보며 화가에 대해 동경을 느꼈다. 집에서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주도립미술관은 이때의 그림을 2016년 작가 대규모 회고전에서 공개한 바 있다. 197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76년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때 “삶 자체와 공존의 울림”을 최상의 가치로 삼겠다고 작가 노트에 썼다. 이후 민중미술 그룹인 ‘현실과 발언’의 동인이 되며 시대정신과 그것의 미학적 실천을 시도했다.
1980년대 후반 그는 현기영의 ‘바람 타는 섬’ 연재의 삽화를 그리게 되었다. ‘바람 타는 섬’은 일제강점기 제주 해녀의 생존권 투쟁이 항일운동으로 발전한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삽화를 그리는 1년 동안 제주를 공부하게 되었고 자기 이름에 담긴 역사의 슬픔이 직접 와 닿기 시작했다. 삽화를 마친 이후 4·3항쟁을 담은 작품 50여점을 완성해 전시했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을 육지의 대중에 처음 알린 계기가 된 자리다.
작가는 전시를 마친 후 슬픔과 분노의 경험으로 심신이 지쳤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시기에 서울 생활에서도 더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 제주로 돌아가 다시 정착하게 된 이유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지며 지도를 들고 제주의 자연을 찾아 나섰다. 제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그곳의 모습이 조형적 형식이 아닌 감정이 담긴 대상으로 다가왔다. 제주 자연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근에는 거대한 풍광이 아닌 작은 풍경을 그리기도 한다. 작업실에 찾아드는 자연의 벗들을 포착해내는 작업이다. 마당을 오가는 고양이, 왜가리, 한조 등과 피고 지는 꽃과 나무가 따뜻한 애정과 정감으로 담긴다. 이전의 작업으로부터 커다란 변화가 있는 듯 보이지만 생명을 소중하게 다루고 진지하게 지키려는 작가의 성정에서 비롯하는 이야기들이다. 그의 작품은 결국 시대를 살아낸, 그리고 살아내는 인간에 대한 숙고다. 작가는 여전히 매해 4·3 미술제에 그와 관련한 작품을 발표한다.
◆순간의 스침으로 담아낸 가을의 장면들
강요배의 이름을 알린 4·3항쟁 연작은 역사화인 만큼 사실적 묘사를 보인다. 반면 강요배의 제주 자연 그림에서는 추상성이 느껴진다. 강요배의 화론은 내면에 들어온 심상(心象)을 추상(抽象)으로 펼쳐놓는 것이다. 그는 매일 집에서 작업실을 오가며 제주의 풍경을 경험한다. 같은 것을 반복하여 보는 것 같지만 매일 다른 장면을 만난다. 그리고 그중 어떤 장면은 작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어 마음에 남는다. 작가는 이 마음에 남은 장면을 잘 기억하고 여과하고 담아두었다가 작품으로 펼친다. 자기가 경험한 풍경의 본질과 거기서 온 깨달음을 화폭에 담는 셈이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기보다 추상적으로 그려지는 이유다.
작가는 이러한 그림을 그리는데 남다른 재료를 활용한다. 1994년 ‘제주의 자연’ 전시를 준비하면서부터 일반적인 붓과 함께 빗자루, 말린 칡뿌리, 서너 겹 접은 종이 붓 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주의 자연을 그리며 투박하고 성근 제주의 땅과 돌과 풀, 나무에 어울리는 도구를 개발한 것이다. 이러한 재료들은 손이 의도하는 대로 잘 따라오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강요배의 손안에서는 통제와 조절이 수월히 이루어진다. 긴 시간 수없이 반복하며 수련한 작가의 손이기에 가능하다.
‘천고(天高)’(2017)는 이러한 작가의 손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요즘 이 가을 하늘을 그린 작품은 특히 자주 떠오른다. 이 작품의 화면에는 새파란 색이 균등하게 칠해져 있다. 다른 계절보다 항상 한 뼘 더 높은 하늘이 지닌 깨끗한 모습이 그대로 담겼다. 작품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높은 하늘이 내 눈앞에 내려온 것만 같다. 이러한 하늘 배경에 얇게 흐르듯 펼쳐진 흰 구름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얇고 가볍게 흘러가는 모습을 이것보다 더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싶다. 작가는 이 흰 구름을 빗자루를 사용해 그려냈다. 빗자루에 하얀 물감을 바르고, 순간의 스침으로 그려낸 결과물이다.
‘상강(霜降)’(2017) 역시 가을날의 모습을 담아낸 그림이다. 상강 무렵 석양을 화면 위에 그려냈다. 상강은 10월 말경으로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다. 불타오르는 해는 없지만, 석양이 구름에 스며든 모습을 그렸다. 덕분에 그 순간의 분위기가 감정적이기보다 차분하게 전해져 온다. 어스름이 느껴지는 짙은 푸른색과 주황색이 번갈아 화면에 퍼져 나간다. 상강 무렵 석양이 가진 붉고도 차가운 오묘한 화면에 스며들어 느껴진다.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리는 데에도 빗자루를 사용했다. 두 작품을 보면 경지에 오른 작가의 재료 사용이 감탄을 자아낸다.
코끝의 차가워진 공기에서 느껴지는 새 계절의 시작. 이 시작을 강요배가 그린 제주의 가을 풍경을 보고 그가 쓴 책을 읽으며 맞이하려니 마음이 설렌다. 한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니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가 그린 그림과 글은 똑 닮았다. ‘삶의 정수를 찾아서’ ‘군더더기를 버리고 단순화하여 명료하게 만들려 한다.’는 그의 작업 여정 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한들 큐레이터/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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