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의 세계 1등 제품을 만든 기업가’, ‘기술보다 사람을 중시했던 인재양성가’, ‘영화감독을 꿈꾸고 레슬링을 즐기던 승부사’….
글로벌 기업 삼성의 오늘에 지대적인 영향을 끼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 붙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27년 동안 삼성그룹을 이끈 그의 리더십을 온전히 표현할 방법은 없다. 이 회장은 ‘은둔의 기업가’(The Hermit King)로 알려졌지만, 경영 일선에서는 남다른 경영감각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거침없는 언사와 추진력으로 거대 기업을 이끌었던 이 회장은 무엇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디자인경영’을 비롯해 ‘열린채용’, ‘품질경영’ 등 남다른 경영철학에서 엿보이는 그의 리더십은 삼성의 오늘은 물론 미래의 동력으로 남아 있다.
◆유년시절 ‘무한탐구’, 훗날 삼성 경영 토대
이 회장은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삼성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의 3남5녀 중 일곱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 회장은 1947년 부친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이후 ‘선진국을 경험해 보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 회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남다른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 즐겨 쓴 휘호가 ‘무한탐구’(無限探究)였을 정도다. 대학 시절에는 자동차에 심취했다.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됐다. 유학을 하는 동안 이 회장이 탄 자동차만 6대였다. 사치스러운 취미라기보다는 자동차에 그만큼 매료됐던 탓이다. 언젠가는 미국에서 4200달러에 구입한 자동차를 한참 타다가 600달러를 더 받고 판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차가운 기업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영화와 레슬링, 럭비 등 대중문화와 스포츠에도 관심이 깊었다. 일본 유학 시절엔 영화에 심취해 1200편 이상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때는 레슬링부에 들어갔고,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에는 당시 전설로 불리던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만난 일화도 있다. 럭비도 즐겼다. 이 회장은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1997)에서 “럭비는 한번 시작하면 눈비가 와도 중지하지 않는다. 걷기도 힘든 진흙탕에서 온몸으로 부딪치고 뛴다. 오직 전진이라는 팀의 목표를 향해…”라고 회상했다. 이 회장이 스포츠에 가진 열정은 훗날 대한레슬링협회장을 역임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맡는 등 스포츠계 활동으로 이어졌다.
◆제2의 창업주…‘반도체’·‘모바일’·‘가전’ 삼각편대
재계에서는 이 회장을 삼성그룹 ‘제2의 창업주’라고 부른다. 이 회장이 삼성그룹의 총수를 맡은 뒤로 사업과 경영 전반이 체질개선을 통해 혁신기업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쌓은 경험들은 훗날 삼성전자의 ‘반도체’·‘모바일’·‘가전’의 삼각편대 사업 포트폴리오로 이어졌다.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일군 삼성은 ‘삼백’(三白)으로 불리는 설탕과 밀가루, 면방직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자동차와 조선과 같은 중후장대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삼성은 현대에 이어 재계 2위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이 회장은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이테크 산업밖에 없다”는 구상으로 반도체 산업 진출을 결심했다. 당초 삼성의 반도체 진출은 기대보다 우려가 높았다. 그러나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선진국)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나.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한다”며 의지를 다졌다. 삼성은 1982년 ‘64K D램’을 출시하며 반도체 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1993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는 지난 3분기 기준 10조원이 넘는 삼성전자 영업이익의 절반 가까이를 반도체가 차지할 만큼 삼성과 우리나라의 대표 산업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진출한 휴대전화 산업도 오늘날 ‘삼성폰’의 근간을 다졌다. 당시 휴대전화는 핀란드 노키아와 미국 모토롤라가 시장 주도권을 쥐고 경쟁했다. 사실상 후발주자가 뛰어들기 힘든 구도에서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투자를 지속했다. 1995년에는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을 거치며 품질을 개선했고, 이른바 ‘이건희폰’(SGH-T100)으로 불리는 제품들이 흥행에 성공했다. 애니콜을 기반으로 삼성은 훗날 휴대전화 패러다임이 스마트폰 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에도 발 빠르게 적응하며 세계 1위 ‘갤럭시’를 만들었다.
‘삼성TV’ 역시 이 회장의 안목에서 비롯됐다. 과거 동양방송(TBC)에 근무했던 이 회장은 TV와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 회장은 당시 브라운관이던 TV가 평면TV의 형태로 전환될 것을 예측하고 액정표시장치(LCD) 전환에 투자를 단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투박한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TV디자인의 혁신을 위해 디자인팀을 이탈리아 등지로 파견해 ‘보르도TV’를 제작했다. 그 결과 세계 TV시장에서 삼성이 1위에 올랐고, 13년째 세계 시장 1위를 지키고 있다.
◆비자금 수사로 퇴진, 복귀했지만 상속분쟁
그가 이끈 27년간 삼성은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위기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이 회장은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1987년 회장에 취임하고 나니 막막하기만 했다.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회장의 경영 방식이 난관에 부딪힌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 산업이다. 이 회장은 1995년 숙원이던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실패했다. 삼성이 고수해 온 무노조 경영 원칙 또한 여론의 질타 대상이 됐다.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며 정계와 거리를 둔 이 회장이지만, 정경유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2003년 대선자금 수사와 2005년 안기부 X파일 도청사건 수사에서 소환될 위기에 처했고, 2008년 김용철 전 삼성그룹 법무팀장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조성의혹에 대한 특검수사로 조사를 받았다.
삼성 비자금 수사는 이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놓고 2선으로 물러나는 계기가 됐다. 훗날 이 회장은 이명박정부의 사면 조치로 경영에 복귀했다. 그는 경영 복귀의 변으로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그룹을 재정비했고,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특검수사 이후 3년 만에 3배로 늘었다.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의 발목을 잡은 것은 다름아닌 형제들이었다. 장자상속의 기조를 깨고 삼성그룹을 물려받은 이 회장에 대해 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누나인 이숙희 씨 등이 이 회장의 차명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1조원대 소송을 제기했다. 상속 소송은 1, 2심에서 이맹희씨가 패소하면서 상고를 포기해 이 회장의 승소로 끝났다. 그러나 형제간의 소송은 이 회장의 심신을 압박한 것으로 전해졌고, 이 회장의 건강이상설은 꾸준히 제기됐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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