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화폐 47억 5000만원 상당 허위 결제
고교생 200여명·무직 청년 등 끌어들여
인터넷 도박·수입차 렌트 비용 등으로 탕진
경찰, 유령업체 지역화폐 가맹 등록 취소
이른바 지역화폐 ‘깡’으로 5억원 가까운 시세 차익을 챙긴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들은 지역화폐 구매 비용이 액면가보다 10% 저렴한 점을 노려 유령업체를 차린 뒤 고등학생 200명 등 1300여명을 끌어들여 허위 결제에 이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중간 모집책에 지역 조직폭력배가 대거 가담하면서 경기와 충남, 울산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범행이 이뤄졌다.
3일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사기, 보조금관리법, 지방재정법 위반 등 혐의로 총책 A씨와 모집 총책인 조폭 B씨 등 4명을 구속하고 중간 모집책 역할을 한 조폭 16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해 3월부터 5월까지 경기와 충남, 울산에 모두 6곳의 유령업체를 차려놓고 지역화폐 47억5000만원 상당을 허위 결제해 할인액 10%에 해당하는 4억7500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 국고·지방비 활용한 지역화폐 ‘할인’ 악용…지자체 시스템에 구멍
범행은 지역화폐가 발행되는 전국 각지에서 이뤄졌다. 최근 발행되는 지역화폐가 기존 상품권이나 카드처럼 현장에서 결제되는 방식뿐 아니라 모바일 상품권과 QR코드로 매장을 방문하지 않고도 결제되는 점을 노렸다.
지역화폐가 특정 가맹점에서 다수 이용자에 의해 최고 한도액으로 집중 거래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이들의 계좌를 추적, 자금책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고 지난해 8월 A씨를 검거해 구속했다.
A씨 등은 거둬들인 범죄이익 4억7000만원 중 총책과 자금책 등이 3억원을 나눠 갖고 하부 조직원들에게는 1억7000만원을 배분한 것으로 조사됐다. 범죄수익은 인터넷 도박과 수입차 렌트 비용 등으로 탕진됐다.
범행에는 가계약금만 내고 빌린 사무실과 임대차 계약서가 이용됐다. 이를 근거로 관할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을 낸 뒤 지방자치단체에 지역화폐 가맹 신청을 했다. 서류상 업종은 화장품 판매업이었지만 이들은 재고 하나 없이 유령 매장을 운영했다. 관할 지자체에선 현장 확인 없이 서류만 보고 가맹 허가를 내준 것으로 확인됐다.
모집 총책인 B씨 일당은 대전과 충남, 전북지역의 조폭을 동원했다. 이들은 지인과 지역·학교 후배 등을 다단계 방식으로 모아 1인당 구매 한도인 50만∼100만원의 지역화폐를 사들이도록 했다. 여기에는 고등학생 200여 명과 무직 청년 등 1330여명이 망라됐다. 이들은 휴대전화를 이용해 간단히 지역화폐를 샀고, 미리 매장별로 이미지를 복사해둔 QR코드를 이용해 매장 방문 없이 지역화폐로 결제했다.
◆ QR코드 결제 편리하지만 허점…조폭, 고교생·무직 청년 등 끌어들여
경찰에 따르면 현재 QR코드를 이용해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지자체는 전국에 79곳이 산재해 있다. 경찰 관계자는 “QR코드를 기반으로 한 지역화폐는 시간과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어 철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에서 범인들은 특정 가맹점에서 최고 한도액을 집중적으로 결제하는 등 비정상적인 거래를 했으나 지자체의 시스템에선 걸러지지 않았다.
경찰은 △지역화폐 악용 △고교생 범죄예방 △청년실업이라는 세 갈래에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지역화폐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필터링’ 등 지자체의 범죄예방 대책이 허술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방 조폭이 전문적인 모집책으로 활동하면서 지역 고교생 등 청소년과 무직 청년들을 대거 범죄에 이용한 정황이 드러난 데 주목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구직난에 허덕이는 청년층과 사각지대에 놓인 지역 청소년들에 대한 보다 섬세한 범죄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총책 A씨는 과거 인력사무소 운영과정에서 알게 된 충남지역 S파 폭력조직원 C씨를 포섭해 범행에 가담시켰다. C씨는 다시 알고 지내던 전북지역 K파 폭력조직원 D씨를 범행 모집책으로 가담케 했다. 이들 조폭 출신 모집책들은 수차례에 걸쳐 텔레그램 등 SNS를 이용해 하부 조직원에게 모집인원을 할당했다.
할당받은 하부 조직원들은 지역 후배 고교생 10여명씩을 유원지, 당구장, 커피숍 등으로 집결시킨 뒤 이들로부터 휴대전화를 건네받아 지역화폐 앱을 설치하게 한 뒤 범행에 악용했다. 다만 동원된 학생들은 지역 선배인 조폭들의 강요로 휴대전화를 빌려줬을 뿐 범행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확인된 유령업체에 대한 지역화폐 가맹 등록을 취소하고 이들이 취득한 범죄수익에 대해 환수 조치할 수 있도록 지자체에 통보했다. 또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지자체 등 관계기관에 공유하고 비슷한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수사를 확대할 방침이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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