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산방산·섭지코지에 당신 닮은 유채꽃 활짝/그대와 나 단 둘이 봄맞으러 가야지
머리카락 스치며 꽃바람 분다. 바람 끝에 매달려 비강을 헤집고 들어오는 진한 꽃향기. 따뜻한 햇살에 달콤하게 달아오른 봄내음은 겨우내 꽁꽁 얼었던 가슴을 여지없이 무장해제시켜 버린다. 몸을 감싼 연두와 노랑의 물결. 얼굴빛마저 노랗게 물들이며 제주 유채꽃밭에 봄이 왔다. 노랗게 핀 꽃 들녘으로 당신과 나 단둘이 봄 맞으러 가야지.
#당신 닮은 제주 유채꽃 활짝 피었네
간만에 휴가를 내고 봄 맞으러 제주행 비행기에 조심스레 몸을 싣는다. 틈만 나면 찾던 제주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오랫동안 못 갔다. 1년도 한참 넘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마치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타는 아이처럼 두근두근 설렌다. 이어폰 속에서 무한 반복되는 노래는 김윤아의 ‘봄이 오면’. 이른 아침 서두른 탓에 눈 감고 듣다 나른한 잠속으로 빠져든다. “봄이 오면 연두빛 고운 숲속으로 어리고 단비 마시러 봄 맞으러 가야지 ♩♬∼”
평일인데도 제주행 비행기는 빈자리 하나 없으니 서둘러 봄을 맞으려는 조급함은 비슷한가 보다. 제주 공항에 내리자 온통 따사로운 햇살이다. 낮 기온 섭씨 18도. 제주는 이미 완연한 봄이다. 제주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노란 유채꽃은 서귀포 표선면 가시리마을 녹산로가 가장 유명하다. 2019년 4월 초 찾았던 녹산로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0㎞ 도로를 따라 노란 유채꽃과 연분홍 벚꽃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모습은 녹산로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경이로운 수채화다. 덕분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지만 지난해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코로나19에도 상춘객들이 몰려들자 트랙터로 유채꽃을 모두 갈아엎어 버렸기 때문이다. 올해는 예전의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녹산로 유채꽃을 보려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니 가장 먼저 유채꽃 소식을 전하는 제수 남서쪽 안덕면 산방산으로 향한다. 마치 거대한 종을 닮은 듯, 모양이 아주 독특한 화산이다. 인근 용머리해안과 함께 제주 화산지형을 제대로 보여 주는 곳으로 점성이 높은 조면암질 용암이 흐르지 못하고 계속 쌓이면서 분화구가 없는 용암돔이 탄생했다. 평야지대에 해발고도 395m 높이로 우뚝 솟아 있어 어디서든 잘 보인다. 산중턱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방굴사가 유명해 많은 여행자들이 사계절 찾는 곳이다.
산방산 앞에는 이미 유채꽃이 활짝 펴 바람을 따라 노랑색 물결로 출렁인다. 2월부터 꽃잎을 열어 제주를 화사한 봄으로 물들이고 있다. 유채꽃 밭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꽃대는 워낙 키가 커 어른들도 머리만 보일 정도로 푹 파묻히니 노란색 물감통에 쑥 빠진 기분이다. 개나리를 닮은 화사한 봄꽃과 억겁의 세월 화산활동과 풍화작용이 만들어낸 독특한 화산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산방산 유채꽃 밭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입장료 1000원을 받지만 전혀 아깝지 않다. 산방산을 등지고 맨 끝에 있는 유채꽃 밭이 강추다. 유채꽃밭과 산방산 전체를 한 컷에 모두 담을 수 있어서다. 두 딸과 여행온 중년의 부부, 젊은 여인들 모두 셀카 삼매경에 빠져 유채꽃 밭을 떠날 줄 모른다.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은 시간과 바람이 빚은 태고의 제주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용머리해안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지형으로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진 신비한 절벽의 단면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산방연대와 산방굴사를 둘러보는 A코스(약 2㎞, 1시간 30분 소요), 사계포구를 거쳐 마을 안길을 걷는 B코스(약 2.5㎞, 1시간 30분 소요), 산방연대에서 황우치해변을 따라가는 C코스(약 5.7㎞, 2시간 30분 소요)를 따라 지질여행을 떠날 수 있다.
#성산일출봉 함께 즐기는 섭지코지 유채꽃밭
산방산에서 동쪽 끝 성산읍 신양포구로 달리면 드라마 ‘올인’의 배경으로 유명한 ‘연인들의 성지’ 섭지코지다. 여기도 이른 봄이 가득하다. 화산과 유채꽃이 만나는 산방산과 달리 섭지코지는 바다와 유채꽃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서 같은 유채꽃이라도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섭지코지는 바다를 향해 갈고리처럼 튀어나왔는데 제주말로 섭지는 ‘좁은 땅’, 코지는 ‘곶’이란 뜻이다. 남쪽 주차장에 주차하고 해안의 기암괴석과 푸른 바다를 즐기며 1시간 30분 정도 천천히 걸어야 섭지코지의 매력을 제대로 알게 된다.
빼어난 절경에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대부분 지나치는데 산책로 입구 오른쪽 해안으로 꼭 내려가 봐야 한다. 검고 붉은 기암괴석이 바닥에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한 바닷물을 담고 있는 절경과 저 멀리 선녀바위의 선돌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난다. 신비로운 모습에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산책로를 따라 언덕을 오르자 왼쪽으로 바람의 언덕과 오른쪽의 방두포등대, 선녀바위가 한 컷에 잡히는 섭지코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특히 내부에 붉은색 화산송이 쌓여 있는 붉은오름과 그 위의 하얀 방두포등대, 그리고 선녀와 용왕 신 아들의 못다 이룬 사랑의 전설이 담긴 촛대 모양의 선돌이 비경을 선사한다. 방두포등대에 오르면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가 만드는 바다풍경을 가슴에 가득 담을 수 있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디자인한 글래스 하우스 왼쪽으로 노란 유채꽃 밭이 펼쳐진다. 무릎 정도 높이의 키 작은 유채꽃들은 이제 막 피기 시작했는데 산방산 유채꽃 밭보다는 자연미가 더 돋보인다. 특히 독특한 성산일출봉과 노란 유채꽃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절경이다.
#짧게 핀 휴애리 매화는 여심 흔들어 놓고
매화도 유채꽃 못지않게 여심을 흔들어 놓는 봄의 전령이다. 사계절 꽃이 지지 않는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은 그윽한 매화향기로 뒤덮였다. 성인 입장료가 1만3000원으로 다소 부담스럽지만 계절마다 화려한 꽃이 피어 제주 자연을 좀 더 예쁘게 즐길 수 있다. 2∼3월은 매화, 4∼7월은 수국, 9∼10월은 핑크뮬리, 11∼1월은 동백꽃이 차례로 휴애리를 꾸민다.
돌하르방의 인사를 받으며 입구를 지나자 화산석 틈에 핀 핑크색 천리향과 노란색 수선화가 발길을 잡는다. 한 줄기 분수가 솟구치는 용천폭포의 예쁜 돌다리 위에 서면 본격적인 봄의 정원이 시작된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돌다리는 근사한 인생샷을 완성한다. 매화올래길로 들어서면 제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초가 원두막과 항아리, 보라색 꽃양배추밭 너머로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근사한 배경이 돼준다. 동백올래길에는 아직 조금 남은 동백꽃잎과 윤기 도는 초록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관상용인 어른 주먹만 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관상용 하귤 나무를 지나면 매화정원이다. 터널을 이루며 흐드러진 매화 덕분에 여심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든다. 남친들은 여친의 가장 예쁜 샷을 완성하느라 손가락이 바빠지는 시간이다. 한편에는 짙은 홍매화가 활짝 펴 연분홍 매화와 함께 자연스러운 포토존을 완성한다. 날도 좋으니 누가 서든 화보가 된다. 지난주 초에 찾았을 때 휴애리 매화가 거의 만개했었는데 강풍이 부는 궂은 날씨로 매화꽃이 순식간에 떨어졌단다. 이 때문에 이달 중순까지 이어질 예정이던 매화축제가 2월 말로 끝나 버렸다니 안타깝다.
극적으로 막차를 타 예쁜 풍경 담아왔으니 사진으로나마 즐기시길. 이처럼 동백과 달리 매화는 짧게 우리 곁에 머문다. 매년 렌즈를 핑크로 물들이는 전남 광양 매화마을의 축제도 코로나19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취소됐다니 흐드러진 매화를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흑돼지 공연장으로 이어지는 토굴에서는 ‘좋을 때다, 우리’라는 네온사인이 여행자들을 맞는다. 누구에게나 지금이 가장 좋고 소중한 시간일 테지. 카르페 디엠(carpe diem). 소중하고 짧은 제주 봄날을 맘껏 즐겨본다.
제주=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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