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으로 청나라 안에 또 다른 ‘나라’가 1850년에 세워졌다. 태평천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입장 정리가 요구됐다. 중국의 18개 성(省)에 해당하는 지역을 태평천국이 ‘영토화’한 결과였다. 이 지역에서 교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태평천국 ‘정부’의 윤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미국인, 특히 종교인들이 중국의 기독교화에 대한 기대가 한층 더 고조된 데 있었다.
태평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건국됐다. 중국의 기독화 기대치를 높이는 데 앞장선 이가 선교사 로버츠였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더 효율적으로 4억명의 중국인을 집단적으로 개종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참이었다. 그렇기에 미국 선교사들은 태평천국의 건국에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태평천국의 ‘황실’은 역시 미국에 호감과 좋은 인상을 가졌고 관계 발전을 기대했다. 건국인 홍수전의 사촌 홍인간(洪仁?)이 특히 미국을 롤 모델로 삼아 나라를 일으킬 구상을 하던 차였다. 그의 구상에는 미국의 대륙 간 철도와 특허권 보호 제도 등의 도입이 포함됐다. 또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낡은 세계관의 폐기도 있었다. 개신교의 윤리에 따라 중국의 낙후된 의전 관습(삼배구고: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예법)의 폐지도 주장했다.
그러나 미 정부와 중국 공사의 입장은 달랐다. 유럽과 차별화된 정책, 즉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강박관념의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서구 열강은 혼란을 틈타 무력으로 청나라를 더 약화시키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장교 출신의 미국 공사 험프리 마셜(Humphrey Marshall)도 동참을 주장했다.
미 정부는 약한 중국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이것이 중립을 지키려는 이유였다. 결과는 태평천국과의 관계 발전도 없었을 뿐 아니라 마셜 공사의 파면(1854)이었다. 약한 중국보다 안정적이고 강성한 중국이 미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미국의 사고가 자리매김하게 됐다.
주재우 경희대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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