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는 8일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배구 여제’ 김연경(33)과 여자배구 대표팀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도전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었을까. 아니면 조금 뒤 흘릴 눈물이 먼저 비가 되어 내렸던 걸까.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한국과 세르비아의 동메달 결정전이 열린 8일 일본 도쿄의 아리아케 아레나. 세르비아의 세계 최고 수준의 라이트 공격수 타니아 보스코비치(33득점, 서브 에이스 6개)의 고공 강타가 경기 초반부터 불을 뿜으면서 한국은 첫 두 세트(18-25, 15-25)를 쉽게 내줬다. 3세트마저 15-24로 큰 점수 차로 매치포인트에 몰렸다. 레프트 표승주의 공격이 엔드라인을 벗어났다. 한국 배구가 낳은 역대 최고의 선수 김연경(11득점)의 ‘라스트 댄스’가 4위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패배가 확정된 뒤 주장으로서 모든 팀 동료들을 코트 위로 불러모은 김연경은 덤덤한 표정으로 “우린 웃을 자격이 있다. 웃자”고 말했다. 그러나 기념촬영을 마치고 동료 누군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고, 이윽고 여자배구 대표팀 모두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극적인 한일전 승리에도, 기적 같았던 터키와의 8강전 승리에도, 눈물을 보이던 동료들과는 달리 차분했던 김연경의 눈에 이날만큼은 눈물이 고였고, 흘러내렸다. 그 역시 배구 여제이기 이전에 이루지 못한 평생의 숙원 앞에서는 약해지는 한 사람이었다.
2012 런던에 이어 2020 도쿄까지. 선수 생활 내내 입버릇처럼 “올림픽 메달이 꿈”이라고 말해왔던 김연경은 두 번이나 딱 한 발자국이 모자란 4위로 동메달을 놓쳤다.
메달을 따지 못했다 해서, 4강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연이어 0-3 완패를 당했다고 그 누구도 김연경과 여자배구 대표팀을 나무랄 수 없다.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한국은 조별예선 탈락할 수도 있다는 예상도 나왔다. 김연경 본인조차 “어느누구도 이번 올림픽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우리 선수들조차 이렇게 잘할 것이라 생각하진 못했다”고 인정할 정도다.
조별예선 탈락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3승 2패로 쉽게 뚫어낸 여자배구 대표팀은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참 앞서는 터키를 3-2로 꺾고 4강 진출에 성공했다. ‘기적’과 ‘감동’, ‘신화’ 등 이번 여자배구 대표팀에는 온갖 수식어와 미사여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결과를 냈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2005년 만 17세에 성인 국가대표로도 데뷔해 2012 런던과 2020 도쿄 올림픽 4강,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여자배구의 굵직굵직한 성과를 앞장서 이끌어온 김연경은 대표팀 은퇴 의사를 시사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과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 들어선 김연경은 “머릿속이 하얗다. 아무 생각이 안 난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어 자신의 올림픽 도전사를 돌본 김연경은 “처음이었던 런던엔 별생각 없이 갔고, 리우 땐 욕심이 컸다. 이번 도쿄는 후회 없이 돌아오자는 마음이었다”면서 “이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모든 순간이 힘들 정도로 준비를 많이 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과 함께 고생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다음 올림픽은 3년 뒤 파리에서 열린다. 3년 뒤 김연경은 30대 중후반이 되는 김연경에게 2024 파리까지 뛸 생각은 없냐고 묻자 그는 “조심스러운 문제다. 귀국 후 의논해 볼 이들이 많다. 다만 사실상 오늘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뛰는 마지막 경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올림픽을 통해 후배들이 앞으로의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해서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도 남겼다.
김연경의 존재 덕분에 남자배구의 인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관심이 커진 여자배구는 이번 올림픽을 거치며 팬층이 더욱 두터워졌다. 그는 “많은 팬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이번 올림픽 치렀다. 꿈 같은 시간을 보낸 것 같을 정도로 매우 즐거웠다”면서 “조금이나마 배구를 알릴 수 있어 기분이 좋다”고 팬들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대표팀 동료들도 ‘불세출의 에이스’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를 아쉬워했다. 김연경과 오랜 시간 대표팀 룸메이트로 지냈던 센터 양효진은 눈물을 흘리며 “(김)연경 언니와 대표팀에서 추억이 많다. 항상 고마웠고, 나의 롤모델로 남을 사람”이라고 말했고, 이번 올림픽 룸메이트였던 표승주는 “끝났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울컥한다. 방을 함께 썼기에 (김) 연경 언니와 마지막이라는 게 더 아쉽고 속상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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