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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없이 ‘툭’ 떨어진 꽃처럼… 사랑도 영원한 건 없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2-04-30 16:00:00 수정 : 2022-04-30 09: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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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이별을 연습하는 계절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는 톰 안홀트
다른 회화작가와 차별화 위해 노력
페르시아계 유대인 혈통 부친 영향
‘페르시안 세밀 회화’에 관심 많아

아라비안 나이트 보는 듯한 ‘2AM’
기하학적 패턴·색감 오묘한 분위기
유럽 모더니즘 회화 드러낸 ‘낙화 I’
화려한 듯 하면서도 서글픔 느껴져
작품 앞에 서있는 톰 안홀트 작가. 학고재 제공

#낙화를 그리는 작가, 톰 안홀트

 

봄에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은 만개한 꽃을 만나는 때다. 가지 또는 줄기의 표면을 뚫고 솟아오른 봉오리가 매일 더 포근하게 변하는 봄의 공기 속에서 꽃으로 개화하는 시간. 하지만 이 순간은 늘 찰나이기에 우리는 개화한 꽃을 바라보는 동시에 낙화(落花)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한다. 비 또는 바람에 순식간에 떨어지는 꽃이 갈변하고 뭉개어지는 모습은 늘 예고 없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화와 그 이후의 과정은 사랑 끝에 급작스레 오는 이별과 닮았고 낙화를 보는 일은 이별을 연습하는 일이다. 톰 안홀트(Tom Anholt, 1987∼)의 ‘낙화 I’(2021)를 보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영국 바스에서 태어난 톰 안홀트는 국제 미술계가 주목하는 회화 작가다. 그는 아일랜드계 어머니와 페르시아계 유대인 조상을 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아스널 FC에서 뛰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14세 때 테이트 브리튼에서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의 개인전을 보았다.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독일 현대 미술계를 이끌었던 베크만의 작품들은 감흥을 일으켰다.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매일 그림을 그려 첼시 칼리지 오브 아츠(Chelsea College of Arts)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뒤 독일로 이주해 베를린에 정착했다.

 

그는 2012년 전시 ‘세상들’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베를린, 코펜하겐,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9년에는 국내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2년 만인 2021년에 다시 한국 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다. 베를린주립미술관, 함부르크미술관, 본 미술관, 프라이에스 박물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코펜하겐 서지센터, 핀란드 컬렉션 미에티넨, 런던 컬렉션 마리오 테스티노, 트레비소 컬렉션 알레산드로 베네톤 등 다수의 기관 및 재단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문화와 역사, 경험과 신화가 뒤섞인 환상

 

톰 안홀트는 작가들이 많이 거주하는 베를린에 살며 자기만의 독자성을 확립하기 위한 숙고를 했다. 다른 회화 작가들과 다른 작업 내용과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자기 역사에 주목하며 그 뿌리가 되는 가족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일랜드계인 어머니는 물론이고 16세기 말 유럽으로 이주한 페르시아계 유대인을 조상으로 둔 아버지라는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회화 장르 중 하나인 세밀 회화(Persian Miniature Painting)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페르시아 세밀 회화는 전면에 밝고 순수한 색상을 사용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빛을 극대화하려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비잔틴 회화와 유사하게도 느껴지는데 그 성격은 매우 다르다. 페르시아 세밀 회화는 삽화로 자주 그려졌기 때문에 책 속에 감추고 볼 수 있는 사적인 면이 있다. 작은 크기의 그림은 누군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지 않는 한 나의 시선 범위 안에만 머문다. 그래서 열린 공간에 설치해 다수가 공유하는 그림보다 더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화면은 중심선을 기점으로 상, 하로 나누어져 있다. 상단에는 초월적 존재를 연상시키는 달이, 하단에는 사랑의 어두운 이면이 담겼다. ‘2AM’(2021). 학고재 제공

‘2AM’(2021)은 작가가 이러한 페르시아 세밀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게 하는 작품이다. 한 남성이 깊은 밤과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 침대 아래로 툭 떨궈진 팔에서 밤과 잠의 깊이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 남자를 둘러싼 것은 다양한 도형과 패턴이다. 몸을 덮은 담요와 바닥의 타일, 창 너머의 마을은 모두 마름모 또는 세모의 반복이다. 휘영청 떠오른 달은 이 패턴들이 지닌 색을 더 밝고 화사하게 비친다. 침대 아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빛 유령 또는 여신이 숨어들어 있다.

 

이 그림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새벽 2시의 장면을 보여준다. 밤은 보통 모든 움직임과 동작이 그치는 어둡고 고요한 시간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가는 밤을 낮에 없던 일들이 벌어지는 환상적인 시간으로 생각하며 표현했다. 침대 아래에 숨어있는 유령 또는 여신은 그림에 신화적 맥락을 부여해 이야기를 끌어낸다. 다만 그 이야기는 하나의 화면에 자리잡아 기승전결이 있는 소설보다 시처럼 나타난다.

 

화면 안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6세기경 페르시아에서 전해진 1000일 간의 이야기를 기술한 설화다. 작가는 세밀 회화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개에서도 혈통적 특징을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의 아버지 역시 이 특징을 반영한 듯 동화책을 쓰고 삽화를 그리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기하학적 패턴과 보라색, 초록색의 사용이 이야기에 초현실적이며 오묘한 분위기를 더한다. 하늘을 칠하며 선명하게 남은 붓질이 만들어 낸 바람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낙화하는 사랑의 서사

 

톰 안홀트는 “수천 년의 미술사를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하나씩 꺼내 쓴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나씩 꺼내어 낸 미술사에는 페르시아 세밀 회화 외에 유럽의 모더니즘 회화도 있다. 그는 세잔(Paul Cezanne), 피카소(Pablo Picasso), 마티스(Henri Matisse) 등의 영향을 받았다. 모두 20세기 초반 모더니즘 회화를 구축하는 데 일조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인상주의에 이어 등장한 야수파, 큐비즘 등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에 없던 다시점의 적용과 단순화, 이차원과 삼차원 사이 긴장 등을 다뤘다.

‘낙화I’(2021). 학고재 제공

‘낙화 I’는 이러한 유럽 모더니즘 회화의 영향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탁 트인 배경 앞에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화를 떠올리게 하는 화병이 놓여있다. 화병 속에는 한 묶음이 될 정도의 줄기들에 다양한 꽃이 피어 있다. 핑크, 오렌지, 연보라색으로 피어난 꽃들은 모습도 가지각색이다. 화려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어쩐지 환희보다는 서글픔이 느껴진다. 화병 속 꽃다발에서 떨어져 버린 한 송이의 낙화 때문이다. 바닥에 ‘툭’ 소리를 내고 부딪힌 꽃은 혼자다.

 

이 작품은 안홀트의 최근 화두인 사랑의 서사를 투영하고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사랑이라는 일을 낭만적으로 이상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의 위태로운 실제 모습을 미리 마주하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낙화 같은 비유적 대상으로 표현해 거부감 또는 두려움 없이 결국 감내하게 해준다. 매력적인 화면 구성과 찬란한 색채는 그 마주하는 시간을 길게 하는 장치다.

 

독일의 미술인 펠릭스 폰 하젤베르크(Felix von Haselberg)는 작가가 이를 통해 사랑에 관한 실존적 경험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작품을 두고 다음과 같이 쓴다. “하나의 형상 속에 전체의 서사가 함축된다. 줄기로부터 떨궈진 꽃은 미약하게 살아 있으며 아직 죽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들이 이 장면에 귀결된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철학자 김진영이 남기고 간 문장처럼 “소멸은 안타깝지만 덧없음이 없으면 저 빛나는 생의 찬란함 또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것은 미약하게 살아 있는 꽃봉오리처럼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마음에 남을 것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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