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썩은 내에 두 다리 힘부터 풀렸다. 낡은 연립주택 입구에 가까스로 발을 들였지만 활짝 열린 현관문을 들어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청소 용역업체 직원들은 안방과 거실 곳곳에 널브러진 살림살이를 포대에 쓸어 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난 8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수원 세 모녀 사건’의 현장은 이처럼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건 희귀 난치병과 생활고였다.
최근 잇따른 비극에는 개인이 감당하기 버거운 어려움이 얽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음 생에는 좋은 부모를 만나라’며 22세 중증 발달장애 딸의 목숨을 앗아간 ‘암 투병’ 엄마의 사연도 다르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50대 A씨는 지난 3월 경기 시흥시의 자택에서 범행을 저지른 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그는 “딸을 죽였다”며 직접 경찰에 신고했다. “저만 살아 법정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다”던 A씨에게 법원은 징역 6년을 선고했다.
A씨가 딸을 살해한 날, 수원시 장안구의 반지하 주택에선 8세 발달장애 아들을 살해한 40대 친모 B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올 7월에는 서울 은평구에서 지적 장애 여동생을 숨지게 한 30대 남성이 구속되기도 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복지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사회적 타살’이라고 규정했다.
국내 자폐·지적 발달장애인의 기대수명은 한국인 평균 83.5세(2020년 기준)에 크게 못 미친다. 국립재활원에 따르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사망자의 평균 연령은 23.8세다. 2013년 16.6세에 비해 늘어난 수치다. 이는 전체 장애인 사망자의 평균 연령 76.7세보다도 턱없이 낮다.
자폐성 장애인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었다. 가족에게 돌봄을 전가하는 사회 구조가 불러온 비극이다. 올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선 ‘발달장애인 가족 10명 중 6명이 극단적 선택을 고민한 적이 있다’는 설문 결과가 공개됐다. 경기 화성시에서 발달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한 가톨릭 사제는 “발달장애인의 부모는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부모가 자녀의 시설 입소를 원하더라도 10%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 ‘내가 죽기 전에 아이 먼저 보내야 한다’는 잘못된 판단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사회가 이들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인기와 영화 ‘말아톤’의 흥행은 잠시나마 소통이 어렵고 과잉 행동의 특징을 지닌 발달장애인의 삶을 가감 없이 공유하도록 했다. 하지만 금세 달아올랐다 식어버린 관심은 ‘대한민국에 우영우는 없다’는 발달장애인 가족의 탄식만 자아내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불붙었던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공론화도 마찬가지다. ‘치매 국가책임제’처럼 가족이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사회가 분담하자는 취지였다. 우리는 중증 치매 부모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먼저 부모를 보낸 뒤 법의 심판을 받던 수많은 비극을 목도한 바 있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는 다양한 ‘어려움’에 선뜻 손을 내밀 순 없을까. 24시간 지원 체계와 다양한 주거 시설 마련, 가족을 위한 집중치료센터 확충이 절실하다. 이는 국가가 책임을 인지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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