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남편과 결별후 홀로된 이주여성
혼자서 아이 출생 등록은 사실상 요원
생부 도움 없인 생모국가 등록부터 난관
이후 국내 외국인 등록·유전자 검사 등
절차 복잡… 결국 아이는 무국적자로
결혼 비자外 출산은 나라서 외면당해
국가에서 아무런 양육 지원 못 받아
‘출생통보제’도 외국인 아동 적용 제외
아이 출생 등록 위해 고아원 선택도
“진료비가 4만원이라고요?”
딸 주은(가명·4)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메이(가명·36)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최근에도 감기로 열이 39도까지 오른 주은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깜짝 놀랐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한국인은 1만원 이내로 약 처방까지 받을 수 있는데, 딸에게는 4배의 진료비가 청구됐던 것이다. 메이씨는 ‘딸이 아플 때, 돈이 없어 병원에 못 데려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늘 달고 산다.
주은이 아빠는 한국인이다. 그런데 주은이는 아직 출생 등록을 하지 못했다. 의료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메이씨는 주은이 아빠와 2020년 헤어졌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남자는 매일 집에서 주정을 부렸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사람과 갈라서야겠다고 결심했다.
“태국 여자? 이 중학생 아이는 뭐지?”
결별한 이후에야 메이씨는 주은이 아빠가 혼인 신고와 딸 출생 등록을 차일피일 미룬 이유를 알게 됐다. 그의 가족관계등록부 배우자 항목에 웬 태국인 여성이 올라가 있었다. 심지어 둘 사이에 자녀도 있었다. 이 여성과 결혼했다가 헤어진 주은이 아빠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혼 처리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2년 가까이 함께 살며 사실혼 관계에서 낳았던 주은이는 졸지에 ‘혼외자’가 됐다.
출생 등록 안 된 아이를 키우는 건 배로 힘들었다. 한국인 아이들은 나이가 찰 때마다 무료로 맞는 예방 접종을 주은이는 20만원을 내고 맞아야 했다. B형 간염, HPV, 파상풍 등 접종해야 하는 가지 수도 많았다. 그때마다 메이씨는 15만∼20만원씩 냈다. 대부분 아동이 보육비 전액에 가까운 금액을 지원받지만, 어린이집에도 한 달에 50만원 넘게 낸다.
11일 세계일보 사건팀이 최근 10년(2013~2022년)간 국내 영아유기·영아살해 판결문 250건을 분석한 결과 상급심 중복 건수 등을 제외한 177건의 사례에서 출산 시 이주여성 홀로 남겨진 경우는 10건(5.6%)이었다. 이주여성은 내국인과 달리 엄마 혼자 아이를 출생 등록할 수도, 양육에 대한 공적 지원을 받을 수도 없다. 이들은 ‘외국인’과 ‘미혼모’라는 이중 약자성에 놓여 있다.
◆까다로운 외국인 출생 등록… 생사 알 수 없는 4168명
주은이처럼 출생 등록을 하지 못한 외국인 아동은 올해 4월 기준 4168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들의 생사는 파악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실에 따르면 2015∼2022년 출생 등록이 안 된 임시신생아번호는 6404개로, 이 가운데 4168개가 출생 신고 의무가 없는 외국인 아동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추정치다. 소병철 의원실 관계자는 “병원에서 출산한 경우만 통계에 잡힌 것인데 미등록 외국인의 상황을 고려하면 드러나지 않은 숫자가 더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4168명의 숫자도 최소치인 셈이다.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이러한 외국인 아동에 대해 “‘미등록’이 아니라 ‘무등록’ 아동”이라고 강조했다. 등록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출생을 등록할 방법 자체가 요원하다는 것이다. 이들 외국인 아동은 생모 국가에조차 등록되지 않아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무국적자로 산다.
메이씨는 지난해 3월 충북이주여성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주은이 출생 등록 절차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출생 등록을 하려면 우선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동안 등록 없이 불법으로 체류했다며 주은이 앞으로 나온 범칙금만 80만원이다. 최저임금 수준을 받는 메이씨에게는 큰돈이다. 게다가 유전자 검사 등 출생 등록 준비로 만날 때마다 주은이 아빠는 그에게 30만∼50만원을 요구했다.
닭 공장에서 일하는 메이씨는 지난달 복날을 앞두고 새벽 6시부터 닭을 잡았다. 결린 목에 파스를 붙이면서도 주은이를 생각하며 참아냈다. 기자와 만난 그는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종일 닭을 내려치는 일만 하면 되는데, 한국어를 잘 못 해도 일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하다”고 했다. 딸이 아플 때 걱정 없이 병원에 데려가고 싶을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메이씨는 주은이의 출생 등록이 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번다.
◆‘한국인의 어머니’로만 호명… 결혼비자 외 출산은 외면
전문가들은 이주여성이 ‘한국인 남성의 아내이자 한국인의 아이를 키울 어머니로만 호명되는 제도’를 가장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한국인과 혼인해 출산할 것을 가정한 결혼비자(F-6) 외 이주여성의 출산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F-6 비자 미소지 이주여성이 낳은 혼외자의 경우 우선 생모 국가에 출생 등록을 해야 한다. 캄보디아같이 생부와 생모 모두 본국 행정기관에 출석해야 출생 등록이 가능한 경우 일이 복잡해진다. 혼인 관계가 아닌 생부가 타국까지 가서 출생 등록을 도와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생모 국가에 출생 등록을 했다면, 한국에서 아이를 외국인으로 등록하고 생부 인지를 거쳐 출생 등록이 가능하다. 이때도 이주여성이 홀로 30만원씩 드는 유전자 검사 비용을 부담해 인지 청구를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생부가 한국인이 아니라면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출생 신고는 아예 불가능하다. 허오 대표는 “아이가 태어난 지 1년6개월이 됐는데 출생 등록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며 “아이의 존재를 증명할 수단이 없어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한국에서 양육을 포기하는 이주여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의료기관이 출생 정보를 지방자치단체에 의무적으로 알리도록 하는 ‘출생통보제’ 법안이 지난 6월 국회를 통과됐지만, 외국인 아동은 적용 대상에서 여전히 제외됐다.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대표부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 등은 부모의 국적, 체류자격, 비정규 이주 상태 등과 무관하게 국내 출생 모든 아동이 출생 신고가 돼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권고했다”며 “외국인 아동의 출생 등록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부분은 아쉽다”고 밝혔다.
제19대 국회 당시 국민의힘 전신인 새누리당에서 ‘이주민 출신 1호’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이자스민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은 “절차와 아동복지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시점”이라고 꼬집었다. 이 위원은 “한 베트남 이주여성이 출생 등록을 위해 고아원에 아기를 맡긴 사례도 있었다”며 “국내 출생 아동에 대해 외국인 등록이라도 되면 좋겠지만 법무부는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비자와 외국인번호를 부여해도 될지 형평성 문제를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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