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풍경·언어를 문학으로 만드는 힘
2023년 노벨 문학상은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에게 돌아갔다. 포세는 사뮈엘 베케트, 해럴드 핀터의 뒤를 잇는 현대 연극의 대가이다. 그는 헨리크 입센의 거실극과 베케트의 부조리극을 결합해 인간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미니멀리즘 연극으로 세계 연극계에 주목받아 왔다.
‘어느 여름날’(지만지드라마 펴냄)은 포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중년의 한 여성이 어느 가을 피오르 바다로 쪽배를 타고 나갔다가 실종된 남편을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입센처럼 거실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베케트처럼 극적 사건이나 갈등 없이 독백의 형태로 과거 기억을 반복해서 토로할 뿐이다. 이 작품이 2000년 북유럽 연극상을 받으면서 포세는 노르웨이 바깥에 널리 알려졌고, 그 연작인 ‘이름’이 유럽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연극상인 네스트로이상을 수상하면서 국제 연극 무대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내 평생/ 하나의 질문과도 같았어/ 하나의 외침과도 같았어/ 우린 서로를 발견했고/ 우리가 서로를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우리 서로를 떠나야 했어/ 하지만 그게 인생이지” 작품 주인공인 중년 여자는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를 내다보면서 남편과의 만남과 이별을 떠올린다. 그들 부부는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를 벗어나서 오래된 집을 구해 이 마을로 들어온다. 그러나 남편은 삶의 불안을 견디지 못한 채, 하루 두 차례 쪽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비바람이 심했던 어느 가을날, 바다로 나간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빈 배만이 발견된다. 남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후 외로움 속에서 화두처럼 그 삶의 의미를 쥐고 성찰을 거듭하면서 살아간다.
만남과 이별, 사랑과 죽음, 상실과 그리움, 공허와 외로움 등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그 뜻을 곰곰이 따지고 성찰할 때, 삶은 비로소 그 심층의 비밀을 드러낸다. 우리 삶을 채우는 것은 관계의 사슬들이나, 우리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것은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 사이에 놓인 여백, 관계 이후에 오는 공백이다. 진짜 삶이란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세간의 사건이나 발화가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 곱씹으면서 사유를 덧대 가는 짧고 단순한 화두들 속에 존재한다.
남편이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 그 의미를 거듭해서 성찰하는 여자의 존재는 우리가 인생에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관계의 여백과 공백을 화두로 삼는 내적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에 이를 수 있다. 포세는 이를 “밝게 빛나는 어둠”이란 역설의 언어로 압축한다. 성찰은 삶의 피할 수 없는 어둠을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지 않고 진실의 빛으로 변화시킨다.
포세는 극적 사건을 통해 인물 갈등을 드러내거나 스펙터클한 장치를 통해 휘황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극히 절제된 대화, 똑같거나 비슷한 단어나 문장의 반복, 침묵과 휴지로 가득한 독백을 통해서 연극을 언어의 예술로 만든다. 이러한 독특한 화법을 포세는 고향 마을에서 배웠다.
작품 배경을 이루는 피오르 해안가는 포세가 태어나서 평생 살아온 곳이다. 말도 없고 감정 표현도 드문 마을 사람들에게서 포세는 말하지 않고 깊은 뜻을 주고받는 문장을 얻었고, 끝없이 들리는 파도 소리로부터 독특한 문장 리듬을 익혔다. 위대한 작가들은 모두 고향의 풍경과 언어를 문학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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