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측 전원 꺼짐 방지 항변 불구
재판부 “성능 저하 가능성 미고지
소비자 앱 실행 지연 예상 어려워”
애플이 아이폰의 성능을 고의로 떨어뜨렸다는 일명 ‘배터리 게이트’ 의혹과 관련해 2심 법원이 소비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애플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된 집단소송 중 소비자가 승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고법 민사12-3부(재판장 박형준)는 6일 소비자 7명이 애플 및 애플코리아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법원이 인정한 손해 배상액은 원고 1명당 7만원이다.
재판부는 “애플은 소비자인 원고에게 업데이트를 설치할 것인지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고지할 의무가 있었지만 이를 위반했다”며 “(원고가) 선택권 등 침해로 인한 정신적 손해가 발생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애플의 배터리 게이트는 2017년 12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됐다. 일부 소비자가 아이폰 운영체제(iOS) 업데이트를 한 뒤 성능이 눈에 띄게 저하됐다고 주장했다. 이후 휴대전화 속도가 느려지면 소비자가 자연스럽게 신형 아이폰으로 교체할 것을 노리고, 애플이 고의로 성능을 떨어뜨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전 세계에서 애플을 상대로 하는 집단소송이 이어졌고, 국내 소비자도 2018년 3월 1인당 2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올해 2월 이런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당초 1심의 원고는 병합된 사건까지 더해 6만2000여명에 달했다. 이 중 7명만 1심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날 원고 승소 판결과 함께 해당 업데이트로 아이폰의 성능이 저하될 수 있음을 소비자에게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점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업데이트 설치에 따른 결과나 영향에 대해서는 애플과 소비자 사이에 현저한 정보 불균형이 존재한다”면서 “원고로서는 업데이트가 최대 성능을 제한하거나 이로 인해 앱 실행이 지연되는 등의 현상이 수반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애플 측은 재판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전원 꺼짐 등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항변했다. 법원은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이폰의 성능이 일부 제한되는 업데이트라면 애플이 소비자에게 설치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을 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고는 이 사건 업데이트 설치 여부에 관한 선택권 또는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기회를 상실했다”며 원고의 정신적 손해가 발생했다고 인정했다.
법원은 다만 이 사건 업데이트로 인해 아이폰에 영구적인 성능 제한이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문제가 된 ‘성능조절기능’은 주변 기온이 낮아지는 등 일정한 조건에서만 작동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됐다. 배터리의 노화나 충전 상태에 따라 에너지 관리를 최적화하는 방법이 사용자의 효용을 해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봤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일부 국가에서는 애플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앞서 나오기도 했다. 애플은 2020년 3월 미국에서 구형 아이폰 사용자 한 명당 25달러(약 3만원)씩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칠레에서 제기된 집단소송에서는 지난해 4월 총 25억페소(37억원)를 배상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이들 판결이 애플의 고의 성능 저하 자체를 인정한 것이라기보다 분쟁을 조기 종결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경영적 판단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국에는 집단소송제도가 증권 분야에만 한정돼 있어 소비자의 집단소송이 제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등에서는 집단소송 판결이 원고뿐 아니라 소송제기를 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도 효력이 발생한다. 소송 당사자에게만 효력이 미치는 국내 민사소송제도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원고를 대리한 김주영 변호사(법무법인 한누리)도 이날 선고 직후 “(7명만 항소해) 용두사미가 됐지만 판결의 의미는 작지 않다”면서 “애플은 (7명 외) 나머지 피해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배상하길 촉구한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또 “앞으로 소비자 분야에도 증권 분야처럼 집단소송 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며 “거대 기업이 증거를 독점하면서 소송에서 우위를 점하는 일을 막기 위해 한국식 디스커버리 제도가 꼭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재판 개시 전 당사자들이 미리 증거를 공개하거나 전문가의 현장조사를 통한 증거를 공유하도록 한 절차로 미국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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