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형 증권사들이 채권형 랩어카운트(자산종합관리계좌)·특정금전신탁 상품을 운용하면서 서로 짜고 고객 간 손실을 전가하는 등 위법 행위를 저지르다 금융감독원 검사에서 적발됐다. 채권형 랩·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의 일대일 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맞춤형 상품이다. 펀드와는 달리 개별 고객의 투자 목적과 자금 수요를 감안한 단독 운용이 특징이지만 실적 배당 상품이라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다. 주로 법인 고객을 상대하다 보니 높은 수익률을 제시해 자금을 유치해 왔다.
문제는 지난해 하반기 자금 시장 경색으로 시장금리가 급등하면서 수익률을 맞추기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증권사들이 고객 돈으로 자전거래에 나선 것이다. 만기 도래 계좌가 손실이 나면 다른 증권사 타 계좌의 기업어음(CP)을 고가에 매도해 수익률을 맞춘 것이다. 대신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고객 계좌를 이용해 유사한 다른 회사 CP를 고가에 사들이는 수법이다. 한 증권사에서만 지난해 7월부터 타 증권사와 6000번 연계·교차 거래하면서 다른 고객 자산에 끼친 손실만 5000억원 수준이라고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증권사들은 고객과의 랩 계약 시 운용 가능한 자산의 만기 한도를 1년으로 약속하고도 4년인 회사채를 편입해 운용했다. 운용 가능한 자산의 신용등급을 AA+로 제한하기로 약정하고도 AA- 회사채를 편입한 사실도 적발됐다. 심지어 고객 동의 없이 한 고객의 서로 다른 계좌 간 자전거래를 통해 목표수익률을 달성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다. 증권사마다 이런 거래가 수백억∼수천억원이라고 가정하면 업계 전체적으로 수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업무 실태 검사에서 9개 증권사 모두 위법행위가 발견됐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증권사의 리스크 관리·통제 시스템에 허점이 수두룩하다는 방증이다. 그런데도 증권사들의 행태가 적반하장이다. 수익률을 맞추기 위한 ‘짬짜미’ 거래를 인정하면서 “일시적 변동성으로 빚어지는 투자자 피해를 막기 위한 관행”이라고 강변한다. 시장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이런 불법을 자행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랩·신탁 상품을 운용할 때 특정 투자자의 이익을 해치면서 자기나 제3자 이익을 도모하는 건 자본시장법 위반이다. 금융 거래의 근간은 신용이다. 철저한 수사를 통해 경영진 개입 여부에 대한 책임을 묻고 위법 행위에 따른 손실에 대해서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원상 복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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