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총애 받던 심상규가 원소유주…1901년 이전 낙선재 자리 잡아"
화려한 단청이 없어 수수하면서도 조선 왕실의 기품이 서려 있는 창덕궁 낙선재 뒤뜰에는 기이한 모양의 돌이 놓여 있다.
받침대에 '소영주'(小瀛州)라는 글이 새겨진 돌은 독특한 자태와 빛을 뽐낸다.
계단 형태의 꽃밭인 화계(花階)와 더불어 낙선재 후원의 매력을 더하는 이 괴석(怪石·괴상하게 생긴 돌)은 처음부터 궁궐에 있었을까.
1일 학계에 따르면 성균관대 한문학과 강사인 진민희 씨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펴내는 학술지 '고궁문화'에 실은 논문에서 '소영주' 돌의 원래 주인이 심상규(1766∼1838)라고 주장했다.
심상규는 조선 후기 형조참판, 병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낸 학자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부친인 심염조(1734∼1783)에 이어 정조(재위 1776∼1800)로부터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들 집안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그만큼 깊었다는 의미다.
심상규는 특히 서울에서도 유명한 장서가였으며, 약 4만권의 책을 소장했다고 한다.
진민희 강사는 낙선재의 '소영주' 괴석 앞면에 새겨진 낙관(落款·글씨나 그림에 작가가 자신의 이름이나 호를 쓰고 도장을 찍는 일) 형태의 글자를 '두실거사'(斗室居士)로 해독했다.
그간 이 글자는 일부가 깨어져 나가서 정확한 판독이 어려웠다.
진 강사는 "두실은 심상규에게 정조가 하사한 호로, '아주 작은 방'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도성 내 가장 크고 화려한 곳으로 손꼽혔던 심상규 집의 당호(堂號·집의 이름 혹은 집에 사는 사람의 이름)로 '두실'을 하사한 사실이 흥미롭다"고 설명했다.
진 강사는 괴석 뒷면에 '소안원'(蕭雁園)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간 괴석 후면부에 새겨진 글자의 존재는 학계에 전혀 보고된 바가 없었고 처음 소개되는 것"이라며 "소안원은 두실 심상규의 서울 집 정원 이름"이라고 밝혔다.
진 강사는 심상규가 남긴 저서 '두실존고'(斗室存稿)에서 소안원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공철(1760∼1840)에게 부치는 글에는 소안원을 '소원'(蕭園)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는 "심상규의 집은 경복궁 동쪽 근지, 지금의 송현동"에 있었을 것이라며 "그의 서울 저택은 신문물을 수입해 소비하고, 신진 학문을 공론하며, 최고급 도시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심상규는 '소안원'이라는 정원을 조성하고 (시를 짓거나 시에 관해 토론·감상하는) 시회를 열어 여러 문사와 자신의 고급 취향을 공유했다"고 덧붙였다.
진 강사는 1817년에 열린 시회 참석자들이 남긴 시와 '두실존고' 기록 등을 토대로 "소안원 시회는 단순한 문학 창작 집단이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교류를 위한 장으로 활용됐다"고 추정했다.
그는 "소안원은 19세기 경화세족(京華世族·서울의 양반)의 고급 소비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며 "낙선재 '소영주' 괴석은 19세기 도시문화를 대표하는 소안원의 정원석"이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소안원의 돌이 언제, 어떻게 낙선재로 유입되었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진 강사는 1901년 서울을 방문한 체코인 엔리케 스탄코 브라즈(1860∼1932)가 남긴 사진에 '소영주' 괴석으로 추정되는 돌이 있는 점을 들어 "1901년 이전부터 낙선재 후원에 자리 잡았다"고 추정했다.
진 강사는 "'소영주' 괴석의 원소유주와 소재지를 밝힌 첫 번째 연구"라며 "19세기 문화사와 서울의 역사, 그리고 문학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연구 의의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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