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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햇볕·비 피해 집 지어
건물 처마가 양산 역할 해와
지금은 처마 없는 집 많아져
나름의 기능 사라져 아쉬워

날씨가 덥다. 햇볕이 강렬하다.

 

길거리 사람들은 모두 더위를 쫓으려 이런저런 것들로 무장했다. 헤드셋 스피커처럼 생긴 선풍기를 목에 걸친 사람, 작은 선풍기를 손에 쥐고 연신 얼굴 여기저기를 식히는 사람, 부채로 땀을 날리는 사람, 챙 넓은 모자를 쓴 사람, 양산을 받친 사람까지 더위를 피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그중 올해 가장 눈에 띄는 부류는 단연 양산을 받쳐 든 남자들이다. 작년까지 양산 쓴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다가 드문드문 가뭄에 콩 나듯 눈에 띄는 정도였다. 양산은 여성의 전유물이었지 남자가 쓸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위가 6월 초순부터 기승을 부리고 올해 더위는 예년 같지 않을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잇따르자 적지 않은 남자들이 양산을 쓰기 시작했다. 체면을 내팽개치고 실속을 택한 것이다. 이참에 나도 집에서 굴러다니던 가벼운 우산을 양산인 양 받쳐 들고 집을 나선다. 한결 시원하다. 모자를 쓰면 정수리에 더운 공기가 갇히고 흘러내리는 땀이 이마에 모여 답답했는데 양산은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몇 년 전부터는 각 지자체에서 거리 곳곳에 그늘막을 설치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잠시 땡볕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한겨울에는 그토록 고맙던 햇볕이 무슨 원수인 양 모두 피할 궁리만 한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지구상에 있는 만물의 근원이 태양이 주는 햇볕이고 하늘의 구름이 뿌리는 빗물이지만 우리 인간은 생겨난 이후로 보금자리를 꾸밀 때 늘 햇볕과 빗물을 피할 궁리로 골몰해 왔다. 인간이 처음 집을 만들었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처음에는 동굴을 기웃거렸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니 찾아 사용하기만 하면 되었지만, 그 수나 위치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직접 집을 만들어야 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동물은 나름의 집을 지어야 했으니,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처음 등장한 것은 지붕만 있는 집이었다. 햇볕과 빗물을 가리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평평한 둥근 땅에 나뭇가지를 원추형으로 꽃아 그 사이를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가죽이나 나뭇잎 또는 마른 풀더미로 덮었다. 다섯 명 내외가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가운데는 돌을 모아 화덕을 만들어 맹수를 쫓거나 음식을 익히고 실내를 덥히는 데 사용했다. 요즘 텐트와 비슷하다. 짐승을 사냥하고 도처에 널린 나무 열매와 곡식을 채집하러 다니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임시로 지었던 집이다. 이른바 ‘막집’이다.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 구석기 유적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집은 신석기인들의 움집이다. 대여섯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땅을 네모지거나 둥글게 50㎝가량 파고 나뭇가지를 기둥처럼 가장자리에 꽂아 그 끝이 만나게 해 원추형이나 A형으로 만든 다음 그 위에 나무 껍질이나 마른풀을 엮어 하늘을 가렸다. 석기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청동기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움집에서 살았다. 움집에는 벽체 없이 지붕만 있었다. 이때에도 하늘을 가리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바닥은 진흙으로 다져 막집보다 정성을 들였고 가운데는 역시 화덕을 두었다. 이때는 농사를 짓기 시작해 정착 생활을 했기에 좀 더 쾌적하고 영구적인 집을 추구했다.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신석기 유적에서 움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후 벽체를 가진 집이 흙집이나 목조 혹은 석조 형태로 발전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에도 서민들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는 움집이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집을 살펴보자. 궁궐의 전각이나 사찰의 절집을 보면 집을 짓는 데 온 정성이 지붕에 맞추어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본적인 기능은 선사시대 막집이나 움집과 다르지 않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은 각각 법전(法殿)이라 하여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조회하는 궁궐의 으뜸 전각인데 그 권위를 지붕으로 표현했다. 지붕을 높고 넓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집을 이층으로 만들고 내부는 통으로 하여 천장을 높게 했다. 특히 처마 끝단을 최대한 바깥 기둥 맨 위를 연결하는 가로재보다 높고 멀리 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궁궐의 전각이나 사찰의 대웅전 등 주요 건축물의 처마와 바깥 기둥 사이에 있는 화려한 짜임새는 모두 이를 위한 장치다. 그냥 멋으로 한 것이 아니라 처마 끝을 높고 멀리 보내려는 구조체다. 이 장치를 ‘공포’ 혹은 그냥 ‘포’라고 하는데 이들이 디자인적으로 멋있어 보인다면 그것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고 갈파한 미국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1856∼1924)을 떠올리면 된다.

 

이랬던 처마였는데, 요즘 짓는 집을 보면 처마 없는 집이 많다. 지붕 끝단이 벽과 거의 맞닿아 있다. 미니멀리즘의 영향으로 처마 없는 지붕이 유행이다. 예전의 권위를 내려놓고 ‘미니멀리즘의 멋’을 부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처마의 기능까지 내려놓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처마는 나름의 기능이 있다. 집이 남향일 때 적당히 내민 처마는 태양의 고도가 높은 여름에는 실내로 직사광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고 태양의 고도가 낮은 겨울에는 실내로 햇볕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처마는 마치 사람이 양산 쓴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와 여름철 실내 온도를 낮추어 쾌적한 공간을 만든다.

 

이렇게 볼 때, 한여름 햇볕을 가리는 양산은 구석기시대 막집이나 신석기시대 움집의 현대판 ‘모바일 버전’이다. 막집이나 움집이야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양산은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지 않은가. 더위를 피하는 데 남녀가 어찌 다를 수 있을까.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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