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고생 2명이 도움을 요청하려고 ‘딥페이크 포르노 제작 사태’를 중국어로 번역해서 온라인으로 알리고 있는 것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중국 정부가 우리를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한국 정부도 그렇다는 것이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슬픈 기분이 들었죠.”
영국 런던에서 한국의 텔레그램 딥페이크 포르노 성범죄를 규탄하는 시위를 주최한 중국인 여성주의자 나나(Nana)는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딥페이크 사태를 처음 접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서술했다. 그가 언급한 ‘슬픔’은 단순히 수많은 여성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고통에 무감한 국가와 사회 시스템 하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이 슬픔의 근원에 있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낀 나나는 곧장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주영한국대사관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계획했다. 서너명의 한국인 활동가 정도가 함께할 거란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어, 단 며칠 만에 한·중·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 출신 여성 100여명이 지난 3일(현지시간) 저녁 거리에 모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사건 직후 해외에서 처음 열리는 집회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집회가 열린 지 약 10일 뒤 세계일보는 영국 현지에서 이 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한 중국인 여성 3명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에서든 해외에서든 시위를 하는 중국인은 신변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는 점에서 이들은 가명 사용을 요청했다.
◆영국에서 열린 한국 딥페이크 사태에 대한 시위
지난 12일 런던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난 나나, 액솔로틀(Axolotl), 모치(Mochi)는 인스타그램 계정 ‘우리 모두 연결된 여성(@weareallchainedwomen)’을 통해 2022년부터 여성운동을 해왔다고 밝혔다. 여성이 늘 시위에 함께했지만 매번 남성들이 자신의 업적만 기록하는 것을 보며 “여성의 공로를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해 직접 시위 활동을 기록하는 계정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공동체가 기반이 됐다. 시위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이들은 직접 거리로 나가 몸으로 부딪히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워갔다. 행진을 하려면 ‘정치적 상징성을 갖는 대사관 앞으로 가야한다’는 것 등 시위의 하나부터 열까지 그렇게 습득했다.
인도 성폭행 사건, 팔레스타인 여성을 위한 시위, 아프가니스탄 여성 인권 문제 등 지난 수년간 족히 20번의 시위를 했지만 이달 초 있었던 한국 딥페이크 관련 규탄 시위는 이들에게 더욱 특별했다. 주로 중국어로만 소통하던 계정이었는데, 이번 시위 계획이 영어로 번역되고 순식간에 여러 나라의 여성들에게 소식이 퍼지면서 참여자의 다양성과 규모 면에서 이전 시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과를 거뒀다.
나나는 “한국인 페미니스트와 함께 시위를 하고 싶었지만 연이 닿을 기회가 없어서 현실에서는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시위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실제로 한국 여성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뜻깊었다”고 말했다. 시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수많은 한국 여성들이 해 준 조언에 따라 이들은 시위를 단 3일 앞둔 시점에 밤을 새워가며 플래카드를 만들고, 법률 감시인과 안전 요원 등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했다.
액솔로틀은 “그동안 편하게 했던 집회들과 달리 이번엔 정말 공식적인 조직으로서 집회를 열었다”며 “한국인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을 거리에서 만난 첫번째 시위이기도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집회 당일을 떠올리며 모치는 “한국 대사관으로 간 적이 처음이라 길을 잘못 들어서 약간 우여곡절이 있었다”며 “그 정도로 미숙했지만 한국어와 영어로 구호를 외쳐주고 용기 있게 발언해 준 여러 나라 여성들의 도움으로 시위를 잘 끝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날 런던에서는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My life is not your porn)”, “딥페이크는 살인이다(Deepfake is murder)” 등의 구호가 울려퍼졌다.
한국 대사관의 반응에 대한 질문에 모치는 “커튼 뒤로 남성 두 명이 우리를 쳐다보며 집회 현장을 촬영했고, 대사관 보안 요원들은 나와서 우리가 하는 말을 녹음했다”며 “중국 대사관이라면 워낙 익숙한 상황이라 좀 더 은밀하게 대응했을 텐데 한국 대사관은 이런 경험이 없어서인지 충격을 받은 것 같았고, 곧 이어 경찰을 불렀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집회가 몇 시에 끝날 것으로 예상하는지 등만 물어보고 떠났다고 한다.
이후 밖으로 나오는 대사관 직원들을 향해 집회 참가자들이 “딥페이크 불법합성물을 보고, 사고 파는 모든 이들을 처벌하라”고 외쳤고, 한국 대사관 관계자들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고 모치는 말했다.
◆한국 여성들의 페미니즘 실천이 미친 영향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요? 당연히 알죠. 이 노래가 시위 현장에서 쓰인다는 것도요. 우리 또래의 모든 중국 여성들이 이 노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여성주의는 중국에서 이미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이들은 입 모아 말했다.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한 ‘불편한 용기’(2018) 시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여성들이 여러 시위 현장에서 부른 ‘다시 만난 세계’는 중국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여성주의자들도 다 알고 노래할 만큼 유명하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한국 여성들이 물결을 일으킨 ‘4B 운동’이었다. ‘아닐 비(非)’라는 한자와 알파벳 ‘B’가 동음어라는 점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인 4B는 남성과의 성관계·출산·연애·결혼이라는 4가지 과업을 수행하지 않는 삶의 형태를 의미한다. 여성이라면 자연스럽게 따르는 생애 과업으로 여겨지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움직임이 집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지금껏 유례가 없었다.
나나는 4B 운동을 처음 알았을 때 “대놓고 정부에 대항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개인 차원으로 일종의 대항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라는 점에서 인상깊었다”며 “국가가 여성을 출산 기계로 도구화하는 것에 개인이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가 이어서 소개한 것은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서 크게 유행했다는 ‘보이 소버(boy sober)’ 트렌드다.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을 뜻하는 ‘소버’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 유행은 서양 Z세대 여성 사이에서 ‘정신적으로 취약해지지 않기 위해 남자를 끊는다’는 의미로 알려져 있다. 이 유행에 큰 영향을 준 것이 한국의 4B 운동, 미국의 낙태 금지 판결 등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나나는 “어린 여성들이 남성에 연연하는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삶과 공간을 누리기 위해 노력해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액솔로틀은 “서구 국가에서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가짜 꿈을 꾸고 있다”며 “이들 나라에서는 이미 성평등을 달성했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다고 믿게 하려는 분위기가 있지만 실은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다 근본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가부장적 세계관을 가진 정부나 사회 시스템이 주는 작은 달콤함에 속지 않고, 성 불평등의 뿌리를 찾아 뽑아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그 과정에서 “국가와 모든 기관의 정책과 법률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며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등이 얽힌 억압 시스템을 꿰뚫어보았을 때 즉각 백래쉬(반발 작용)를 맞닥뜨린다는 것은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이어 “오랫동안 우리는 정치적 우울증, 아무것도 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려 왔지만 지금은 적어도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고 연결되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모치는 “이 모든 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지만 어느 순간 답을 찾았다”며 “당장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정신적 건강을 위해 이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이를 통해 오랜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일단 개인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해결책이라는 의미다.
그는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떤 면에서는 매우 비현실적일 수 있다”며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고 더 많은 친구를 알게 되는 강력한 힘과 연결감을 갖는 것에서 활동을 지속할 동력을 얻는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실제로 집회 활동을 시작한 이후 함께하는 그룹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데서 희망을 본다고 했다.
◆동아시아 맥락에서 공유되는 여성인권 문제에 함께 대응하자는 제안
“여성인권, 가정폭력 문제 등을 숨기려 하고 이 문제를 다른 나라 언어로 알리려는 여성들을 ‘국가 망신 시킨다’며 막으려는 사회의 유구한 전략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한국 페미니스트들과 저희가 너무 비슷해서 거울을 보는 것 같다고 한 적이 있어요.”
나나는 한국 여성들로부터 “우리는 한국 정부는 물론 한국 언론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중국 여성들이 믿을 만한 중국 언론을 못 찾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을 알았다. 그런 이유로 만들어낸 슬로건이 ‘우리의 국적은 여성(Woman is our nationality)’이다. 그는 “어떤 배경이나 나라에서 왔더라도 여성이라는 점이 우리를 아우르며, 다양한 국적의 페미니스트 간 연대를 보여주기 위한 완벽한 슬로건”이라며 “이는 우리가 결국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교, 가부장적 정부라는 공통점을 가진 동아시아 국가의 여성 간 접촉은 그 중에도 더욱 중요하다고 이들은 역설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불법촬영,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딥페이크 성폭력에 이르는 디지털 성범죄의 역사를 꿰고 있는 이들은 “여성들의 일상을 포르노로 만든 것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는 “9월 21일에 서울에서 딥페이크 관련 큰 시위가 열린다고 들었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한국 여성주의자들의 용기가 여러 국적의 여성들에게 불러일으킨 각성에 대해서도 이들은 여러번 언급했다. 나나는 “중국 여성주의자들이 한국 페미니즘의 4B 운동과 문학 작품 등에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한국 여성들이 알고 있느냐”고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어로 번역된 ‘한국 여성 문학’ 작품들이 많습니다. ‘82년생 김지영’, ‘채식주의자’, ‘바깥은 여름’과 같은 고전들이요. 김애란, 김초엽, 한강 같은 작가들은 중국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유명합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