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크고 눈이 맑은 여학생 Y가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해주었다. 인쇄를 해오면 여백을 이용해 고치고, 그것을 다시 타이핑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의 반복은 인내를 요했다.”(「작가의 말」, 『채식주의자』, 273쪽)
두 번째 장편 『그대의 차가운 손』을 출간한 뒤, 한강은 2002년 겨울부터 『채식주의자』의 연작이 되는 중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필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연작소설의 앞에 들어가는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은 컴퓨터 대신 손으로 써야 했다. 손가락 관절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볼펜으로 자판을 눌러 완성한 작품
한동안은 아예 작업 자체를 할 수도 없었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통증은 손목으로 번져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너무 아파서 백지 한 장을 채울 수 없었다고, 힘겨웠던 당시를 그는 나중에 기억했다.
“그나마 손으로 쓸 수 있을 때가 좋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백지 한 장을 채우기 전에 손목이 아파 계속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음성인식 컴퓨터? 손끝에 대면 전기 자극으로 작동되는 키보드를 주문 제작하는 일?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 나는 지쳐버렸다.”(「작가의 말」, 『채식주의자』, 273쪽)
혹시 양손에 볼펜을 거꾸로 잡고서 자판을 두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상당 기간 자포자기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 이상한 자세였지만 타이핑을 할 수 있었다. 볼펜을 잡고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익숙해지자 비로소 혼자 힘으로 집필할 수 있었다. 마지막 중편 「나무 불꽃」은 이렇게 쓸 수 있었다. 파일 명은 ‘고통 3부작’! 이때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동생은 말했다. “「진기명기」 같은 프로에 나가도 되겠다”고.
어느 새 작품을 쓰는 속도가 달라져 있었다. 등단 초기만 해도, 첫 창작집을 1년여 만에 써낼 정도로 부지런했는데…. 작품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썼던 것도 다시 보게 됐다. 결과물은 빨리 나오지 않았다. 글 쓰는 스타일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힘들었다…. 그 시기는 돌아보기도 싫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그걸 다시 소설로 써보면 어떠냐고 하는데, 못 쓸 것 같다.”(채널예스, 2010. 6)
그리하여 중편소설 「채식주의자」를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 중편소설 「몽고반점」을 『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에 먼저 발표했다. 마지막 중편 「나무 불꽃」은 1년이 지나서 이듬해 『문학 판』 겨울호에야 발표할 수 있었다.
#왜 영혜는 나무가 되려 했을까…현대의 ‘팜므 프라질’
연작의 첫 중편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인 ‘나’의 시선으로 서술된 영혜 부부에 관한 이야기이고, 「몽고반점」은 영혜의 언니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 ‘나’의 시선으로 인혜 부부에 대한 이야기다. 마지막 「나무 불꽃」은 인혜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인혜와 영혜 자매의 이야기. 이야기들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 구조로 연결돼 있다.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끌리지도 않았다….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신선함이나 재치, 세련된 면을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나에게는 편안했다.”(『채식주의자』, 8-9쪽)
영혜의 남편 시각으로 전개되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꿈에 나타난 끔찍한 영상에 사로잡혀 어느 날부터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로 변해간다고 믿는다. 월급쟁이 남편은 아내 영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처가 사람들을 동원해 영혜를 말리고자 한다. 언니의 집들이에서 영혜는 또 육식을 거부하고 못마땅한 장인이 강제로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으려 하자, 영혜는 손목을 긋는다. 영혜와 남편은 이혼한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채식주의자』, 72쪽)
특히 「채식주의자」에서 처음으로 이탤릭체가 고립되고 소외된 영예의 심리,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쓰인다. 이후 여러 작품에서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탤릭체가 사용된다.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의 시각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중편 「몽고반점」에서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 ‘나’는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영혜의 몸을 욕망하게 된다. 나는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처제에게 찾아가 비디오작품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나는 처제의 몸에 보디페이팅을 한 뒤 자신의 몸에도 그림을 그려서 영혜와 교합한 뒤 작품 촬영을 하게 되는데….
“목까지 조명을 받아 캄캄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으나, 허벅지 안쪽을 붓끝이 스쳐갈 때 떨림이 전해져 오는 것으로 미루어 예민하게 깨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채식주의자』, 127-128쪽)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연작의 마지막 「나무 불꽃」에서 인혜는 식음을 전폐하고 링거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를 만나고, 영혜는 이제 곧 나무가 될 거라고 말한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채식주의자』, 237쪽)
그는 마지막 중편 「나무 불꽃」을 발표한 뒤 1년이 지난 2007년 10월 세 편의 연작소설을 수정하고 묶어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창비)를 출간했다.
#“극단 서사를 통해 인간성 질문 던지고 싶었다”
주인공 영혜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하고 남편과 형부, 언니의 관찰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어린 시절 폭력의 기억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영혜는 때로는 불안하거나 병약해 보이기도 하고, 때론 섬세하거나 상처받기 쉬워 보이기도 하고, 때론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무해한 존재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영혜의 모습을 ‘팜므 파탈(Femme Fatale)’과 대비되는 ‘팜므 프라질(Femme Fragile)’로 설명하기도 한다.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배어나오는 부러질 듯 단단한 의지, 어딘지 모르게 병적인 아우라, 그리고 불안, 이런 여성의 초상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다. 팜므 프라질…. 프라질이란 단어의 뜻이 명시하는 대로 부서지기 쉬운, 불안정한, 섬세한, 병약한, 상처받기 쉬운 특성들을 지닌 여성 이미지는 한강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여성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외형적인 특징들에 부합한다.”(정서희, 2012.2)
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어떻게 보면 삶을 껴안는 것이 어려웠던, 그럼에도 삶을 껴안고자 몸부림치는 여자들, 그래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강 작가의 설명이다.
“주인공 영혜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식물이 되려고 합니다. 이 극단적인 서사를 통해 저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려고 했습니다. 어려운 질문이지요. 인간에 대한 질문은 저에게 중요한 것이라서 앞으로도 계속 질문하면서 써 나가고 싶습니다.(폭력성에 대한 저항이 주요 메시지인가요) 인간의 폭력에 대한 고통이 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우리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향하게 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년이 온다’를 쓴 후 더욱 그 고민을 더듬어 가게 됩니다.”(전승훈, 2016.5.18.)
독자들과 가진 낭송회에서도,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저에게는 삶을 껴안는 게 언제나 숙제 같은 일이에요. 『채식주의자』도 삶을 껴안는 걸 어려워하는 자매의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토록 인간인 게 싫고, 그토록 삶을 껴안는 게 힘든 자매의 이야기. 다른 작품들 역시 삶을 껴안고자 하는 몸부림 같은 걸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우리가 정말 살 수 있다면, 살아가야만 한다면 결국은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연결되는 거죠.”(임수빈, 2016.6)
특히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들의 강렬한 서사 이외에도, 극단적 채식이 불러오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형부와 처제의 근친이라는 금기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안데르스 올손 노벨문학상위원회 위원장은 『채식주의자』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며 작품 내용 분석과 평가를 덧붙였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주인공 영혜가 음식 섭취의 규범에 복종하기를 거부했을 때 벌어지는 폭력적인 결과를 묘사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그녀의 결정은 전혀 다른 다양한 반응에 부딪힙니다. 남편과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는 그녀의 행동을 강제로 거부하고,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는 그녀의 수동적인 몸에 집착하며 에로틱하고 미학적으로 그녀를 착취합니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언니는 그녀를 구출해 ‘정상적인’ 삶으로 돌려보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영혜는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식물 왕국의 상징인 ‘불타는 나무’를 통해 정신병과 같은 상태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노벨상 위원회 홈페이지)
#「이상문학상」 수상…차세대 한국문학 기수로
이미 한국소설문학상과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았던 한강은 연작 소설을 집필해 차례로 발표하던 2005년, 중편 「몽고반점」으로 권위 있는 이상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심사위원 전원일치 평결. 심사위원이었던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기이한 소재와 특이한 인물 설정, 그리고 난(亂)한 이야기의 전개가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차원 높은 상징성과 뛰어난 작법으로 또 다른 소설 읽기의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1970년대생 작가로서 처음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강은 차세대 한국문학의 기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후 황순원문학상과 김유정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국내의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다.
특히 아버지 한승원도 이미 1988년 같은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기에 부녀가 동시에 수상했다며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승원과 한강 부녀의 작품 세계는 이미 서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아버지 한승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스스로 “저의 작품 세계가 리얼리즘 쪽에 더 뿌리를 두고, 불교적이고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원형의 세계에 맞닿아 있다”면, 딸 한강의 그것은 “환상적인 쪽에 가깝고, 세계 작가적 감성을 얻고 있다”고 대비한 바 있다.
한강은 이미 2000년 전후 전통적 서사와 문법에서 벗어나 있었다. 인물들은 주변 인물들과의 소통 불능에 몰이해와 고립의 상태에 빠지지만, 그럼에도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전 소설 경향과 변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주제나 제재는 여성과 몸으로 크게 확대됐고, 환상성을 적극 도입해 서사 효과도 높였다. 견고한 문장 대신, 단문이나 이텔릭체 문장 등 파편화되고 다양한 형식과 시적인 문장을 통해 억압된 여성의 목소리를 내거나 인간의 내면을 밝히는 데 본격 나선다(김선희, 2013.8). 한강은 어느 새 한국문학의 격류가 되고 있었다.(→제7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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