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과 면담 뒤엔 “원더풀”
삼성·카카오·크래프톤 등도 만나
中 추격에 우군 확보 목적 분석도
日총리 만났지만 한국 정부 ‘패싱’
리더십 부재 지적… “대응 아쉬워”
인공지능(AI) 패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 간 경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찾았다. 올트먼 CEO는 4일 하루 일정을 20∼40분 단위로 쪼개 쓰며 광폭 행보를 이어갔다. 그는 삼성전자·SK그룹 수장과 연이어 만나고 카카오와 전략 제휴를 발표하며 한국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다. 올트먼은 “한국의 AI 채택률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라며 한국 시장에 기대를 표했다. 일본·한국에 이어 5일 인도로 출국하는 그는 이번 방문을 통해 아시아에서 대중(對中) AI전선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전날 한국에 입국한 올트먼은 4일 오전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개발자 대상 워크숍 ‘빌더 랩’ 강연을 시작으로 바쁜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행사장 주변은 삼엄한 경비 속에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중국 AI기업 딥시크가 AI 생태계를 뒤흔든 후 올트먼의 방한이 이뤄진 만큼 가는 곳마다 화제였다. 최근 딥시크는 오픈AI보다 인력·비용은 몇 배나 적게 들이고 성능은 비슷한 AI 모델 딥시크 V3와 R1을 공개했다.
이 행사 직후 올트먼은 같은 호텔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8개월 만에 만나 40분가량 면담했다. 그는 면담 소감을 묻자 “원더풀(굉장했다)”이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최 회장에 대해선 “나이스 가이(좋은 사람)”라고 말했다. 앞서 올트먼은 지난해 1월 방한 중 최 회장을 만나 관계를 다졌다. 또 같은 해 6월 최 회장의 미국 출장 당시 샌프란시스코 오픈AI 본사에서 만나 AI 산업의 미래 등을 논의했다.
올트먼은 이날 호텔 내 접견실·행사장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는 도중 취재진 질문에 간단히 답하거나 짧게 인사했다. 오전 중 국내 게임사 크래프톤의 김창한 대표를 30분가량 면담하고 카카오 기자간담회로 이동하면서는 “오늘 중요한 발표를 하게 돼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정신아 카카오 대표는 올트먼이 동석한 가운데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두 회사의 전략적 제휴를 발표하며 “카카오의 5000만 사용자를 위한 공동 제품을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양측은 지난해 9월부터 ‘AI 서비스 대중화’를 목표로 기술과 서비스, 사업 등 다양한 범위에서 협력안을 논의했다. 두 회사는 제품 공동 개발을 위해 인력 교류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 협력 관계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오찬은 국내 대기업 오너 3·4세들과 가졌다. SK네트웍스 최성환 사장, 조현상 HS효성 대표, 허윤홍 GS건설 대표, 이규호 코오롱 부회장, 정종환 CJ ENM 콘텐츠·글로벌 사업 총괄, 유우진 LG전자 오픈이노베이션 담당이 함께했다.
올트먼은 이들과 식사하며 AI 기술의 미래, 기업별 AI 활용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는 국내 벤처캐피털(VC) SBVA가 마련했다. 오찬에는 SBVA의 모회사인 디에지오브 손태장 대표도 참석했다. 그는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의 동생이다.
오찬에서 올트먼은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챗GPT 구독자를 보유한 국가로, AI 기술 적용이 활발한 시장 중 하나”라며 “오픈AI는 에너지, 반도체, 데이터센터 운영 및 AI 인프라 구축 등에서 한국 기업과 협력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올트먼 일정의 ‘백미(白眉)’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회동이었다. 올트먼은 오후에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으로 이동해 이 회장, 손정의 회장,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 Arm의 르네 하스 CEO와 4자 회동을 했다. 이 자리에서는 미국의 AI 인프라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를 포함한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 앞서 오픈AI와 소프트뱅크, 미국 오라클은 최소 5000억달러(약 720조원)를 투자해 AI 인프라 기업 스타게이트를 설립하기로 했다.
올트먼은 지하주차장을 통해 회동 장소에 들어갔으나, 손 회장은 취재진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로비로 향했다. 팬의 사인 요청에도 응했다. 삼성전자 직원들도 로비에 내려와 손 회장을 촬영하고 사인을 기다렸다. 일부 직원은 탄성을 내기도 했다.
올트먼이 이날 국내 반도체·정보기술(IT) 기업을 잇달아 만난 것은 아시아에서 우군을 만들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현재 오픈AI는 최대 경쟁사인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이어 중국 기업의 맹추격에 직면해 있다. 앞서 올트먼은 전날 일본에서 손 회장과 합작사 ‘SB 오픈AI 재팬’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이 합작사는 ‘크리스털 인텔리전스’라는 기업용 생성형 AI를 개발할 계획이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이를 사용하고 오픈AI에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 올트먼은 5일 인도 뉴델리로 출국해 현지 기업·정부 관계자를 만날 예정이다.
올트먼이 국내 기업 총수와 관계를 돈독히 한 것과 달리 정작 한국 정부는 ‘패싱’해 아쉬움을 남겼다. 국내 정치적 혼란 속 리더십 부재로 사실상 트럼프 행정부의 AI 정책을 대변하는 올트먼과 한국 정부가 접점을 만들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세계일보 취재 결과 중소벤처기업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AI 관련 부처는 물론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올트먼 CEO와 방한 전 사전접촉이 없었다. 이는 올트먼이 전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만난 것과 대비된다. 빌더랩에 참석한 일부 AI 업계 관계자들은 “스타게이트는 사실상 트럼프 정부의 프로젝트여서 올트먼의 이번 방문에 정부가 발 벗고 나섰어야 한다”며 “리더십 공백의 영향이 크겠지만, 그럼에도 현 정부 대응은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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