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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詩의 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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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2-08 06:00:00 수정 : 2025-02-06 20: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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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시선집 ‘나만의 미당시’

 

 

●서정주

 

△1915년 고창 출생.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화사집’, ‘귀촉도’, ‘신라초’, ‘질마재 신화’, ‘팔할이 바람’ 등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됨. 2000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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