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씨는 판화가이기 이전에 문인들의 친구다. 20여년간 그와 진한 교분을 나눈 시인, 소설가가 적지 않다. 그는 각종 문단 행사는 물론이고, 대폿집 주연에도 빠지지 않는다.
지난해 전주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축제에 ‘주객’으로 참석했고, 연말에 소설가 김연수가 지인들만 초대한 기타 연주회에서도 자리를 빛냈다. 살가운 재담 덕분에 그의 주변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장서표에는 그렇게 우정을 나눈 작가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압축돼 있다.
소설가 윤대녕씨의 장서표엔 사슴 한 마리가 뿔을 곧추세우고 서 있다. 남궁씨는 그에게서 “삶의 쓸쓸함을 이미 알아버린 고고한 사슴의 이미지를 본다”고 말한다. ‘칼의 노래’ ‘남한산성’을 쓴 김훈씨의 장서표는 책과 연필, 자전거의 조합이다. 정호승 시인에게는 낙타 문양을 헌정했다. 일전에 정 시인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사막을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에 낙타가 없다면 얼마나 황폐할까”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 책의 부제가 ‘남궁산 장서표 이야기’인 만큼 그가 쓴 산문이 도두보인다. 장서표 감상 재미는 외려 부차적이다. 문장 곳곳에서 진솔함과 더불어 낙천주의자의 재치와 넉살이 반짝거린다. “아버지와 같은” 신경림 시인과 민요를 찾아 전국을 주유한 경험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상행선 통일호 기차에서 숙취로 구토하던 한심한 어린놈의 등을 두드려 주던 따스한 손길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선생으로부터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웠다.”(134쪽)
또래 문인들, 친구에 대한 글에는 막역지우의 편안함을 그대로 옮겼다. 고운 생김새를 지닌 박남준 시인 편에서는 “나 역시 외모에 관한 한 빠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운명적인 라이벌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의뭉스럽게 말한다. 축구광인 문학평론가 서영채씨는 축구공이 새겨진 장서표를 받아볼 뻔했다. 남궁씨가 진지하게 “축구공을 새길 것인가, 책을 새길 것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이다. 작가를 장난스럽게 ‘궁산’이라고 부르는 안상운 변호사에게는 ‘성(姓)희롱’ 혐의가 씌워졌다.
책은 2003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일간지에 연재했던 장서표 이야기를 묶은 것이다. 남궁씨는 “장서표 이야기를 통해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고 말한다. 특히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가 당신에 관한 글을 읽고, 그에게 손수 엽서를 보낸 일이 뭉클했다. 그는 “불편한 몸으로 손수 쓰신 어린아이 같은 글씨체 때문에 엽서를 받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회상한다.
남궁씨의 장서표 화풍은 서울 시민에게 익숙하다. 퇴근길에 잘 살펴보자. 그의 판화작품이 ‘오늘의 말씀’과 함께 휑한 지하철 승강장 벽면을 장식한 지 꽤 오래됐다.
심재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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