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식물인 미국자리공에게 씌워진 오명(汚名)들이다. 지금은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졌지만 한때 온 나라가 미국자리공 얘기로 소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사회분위기가 엉뚱한 애국심과 버무려지면서 미국자리공은 공분(公憤)의 대상이 됐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얘기가 쏙 들어갔다. 미국자리공에게 면죄부라도 주어진 것일까.
#1993년 전국이 뜨거웠다
50년대 미국 구호물자에 묻어서 국내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미국자리공. 시골에선 장독대나 화단에 조경용으로 심어 놓기도 했다. 아이들은 포도송이처럼 검붉게 익은 열매를 따서 물감처럼 갖고 놀곤 했다. 그렇게 잘 적응해 가던 미국자리공에게 시련이 닥친 건 1993년이었다.
그해 4월 서울시립대 이경재 교수의 발표는 이후 수개월 벌어진 무차별 공격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정상인 생태계에서는 자생식물과 경쟁에서 뒤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미국자리공이 울산과 여천 공단 주변 숲에서 급속히 번져 우리나라 자연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극심한 오염지역에서 미국자리공이 보여주는 강인한 생명력에 많은 사람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자리공은 금세 ‘독초의 대명사’가 됐다. 독소를 내뿜고 독성을 지닌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서 주변 토양을 산성화시킨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국자리공이 5∼6년 생육하다가 자체 독성으로 소멸되면 참억새가 나타나고 이어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로 변모한다는 것이었다. 90년대 후반 전국적인 황소개구리 잡기 운동 못지않은 대대적인 미국자리공 퇴치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진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미국자리공 열매. |
#오명을 벗을 때가 됐다
전문가 의견은 미국자리공의 유해성이 이제 생태계 파괴와 무관하다는 쪽으로 모아진 상태이다. 미국자리공이 토양을 산성화시킨다기보다 ‘산성 토양에서 잘 자랄 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 길지현 연구사는 17일 “지금까지 연구 결과 미국자리공이 토양을 산성화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고 말했다.
어느 식물이든지 다른 경쟁 식물의 성장을 늦추도록 하기 위해 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미국자리공은 환경부와 국립환경과학원이 지정해 발표하는 ‘생태계 교란 외래식물’ 목록에도 올려지지 않았다.
국립수목원 이병천 박사는 “귀화식물 중에 달맞이꽃이나 돼지풀은 숲속이나 음지에서 견디는 내음성(耐陰性)이 약한데 미국자리공은 강하다 보니 더 쉽게 번성했던 것”이라며 “미국자리공이 여천과 울산에서 많이 발견된 것도 오염돼서라기보다 식물 성장에 필요한 질소성분이 많고 땅이 비옥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식물병리학과 농학 분야에서는 미국자리공에서 약재 성분을 추출해 내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미국자리공 잎과 뿌리에서 항균 단백질인 렉틴이나 항균 펩타이드(Pa-AFP)를 얻어내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시골에서는 미국자리공이 ‘장록’이라는 이름으로 신경통이나 류머티즘 치료 약재로 쓰이고 있다.
미국자리공을 둘러싼 논란은 외래식물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하는 긍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도 사실이다.
미국자리공 논쟁에 불을 댕긴 이경재 교수의 생각은 바뀌었을까. “대처방안이 없다. ‘나쁘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논란은 이제 떠난 듯하고 현상을 인정하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박희준 기자 july1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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