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 기원전 2세기 성으로 축조, 소국들 병합하며 거대한 왕성으로
유적보호·재산권 행사 장기간 충돌… 주민 이주할 신도시 조성 생각할 때
서울이 수도의 역할을 한 지는 얼마나 되었을까. 조선 건국 이후라는 대답이 많지 않을까 싶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한 것이 1394년이니 600년이 넘었다. 신라는 경주에, 고려는 개경에 수도를 두었으니 자연스러운 대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수도 서울’의 역사는 2000년 전에 시작됐다. 백제가 건국 초기 서울에 터를 잡고 나라를 열었기 때문이다. ‘한성도읍기’(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라 불리는 때다. 이 시기를 증명하는 유적이 서울의 ‘풍납토성’이다.
하지만 여전히 풍납토성이 증명하는 백제사가 온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유적 정비와 주민의 재산권 행사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보호의 해묵은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풍납토성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이 1963년, 꼭 50년 전이다. 지난 25일 서울 송파구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풍납토성 사적지정 5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선문대(총장 황선조) 주최로 열렸다.
◆“잘못 만들어진 백제사”…식민사관 극복의 한계
이종욱 서강대 석좌교수는 풍납토성이 증명하는 백제사의 온전한 복원을 주장했다. 그는 ‘한성 백제 왕궁(풍납토성) 유적 발견의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에서 “잘못 만들어진 백제사가 풍납토성을 바로 볼 수 없게 만든다”며 “백제사를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잘못 만들어진 백제사’로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이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과 이를 극복하지 못한 한국사학계의 현실이다. 쓰다 소키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백제사 관련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가 전하는 백제 초기의 기록을 왜곡된 것으로 보고 백제사의 시작을 근초고왕(346∼375년)으로 잡는다. 그 이전의 역사를 인정할 경우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식민사학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이병도, 손진태 등이 해방 후 역사학계의 주류가 되면서 이런 주장은 이어졌다는 게 이 교수의 시각이다. 식민사학이 부정했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중국 기록과의 절충을 시도하는 1980년대 이후의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런 견해에 대해 “삼국사기에 나오는 (3세기) 고이왕 이전의 기록을 불신했기 때문에 고이왕대에 비로소 (백제에)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해왔다”며 “이런 틀이 (교과서와 같은) 국민 교육용 콘텐츠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에 대한 방사성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를 토대로 “백제의 모체가 되는 십제(什濟)의 형성시기를 기원전 2세기까지 올려보아야 한다”며 “기원전 1세기 말 또는 기원후 1세기 초에 (십제가) 백제로 성장했다. 1세기 전반에는 경기도 일원을 지배하는 왕국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풍납토성도 기원전 2세기쯤 조그만 성으로 축조되었고, 소국을 병합하여 동원할 수 있는 인원과 물자가 늘어나며 몇 차례의 수축을 거쳐 거대한 왕성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초기 백제의 위용을 보여주는 풍납토성의 발굴 현장 모습. 풍납토성은 한성에 도읍을 두었을 무렵 백제의 모습을 추측하게 하는 유적이다. 하지만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유적이 위치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일대의 개발이 제한되면서 유적 보호와 주민 재산권 보호가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문화재의 보호와 재산권의 보호는 종종 충돌한다. 유적이 발견되면 해당 지역의 개발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풍납토성은 이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에 속한다. 풍납토성의 보존, 정비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 제한으로 이어지면서 큰 갈등을 빚었다. 학술세미나에서는 이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견해로 표현됐다.
1997년 풍납토성에서 백제 왕궁유적을 발견한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풍납토성에 거주하고 있는 약 5만명 주민들의 재산권에 대한 보상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풍납토성을 대체할 수 있는 신도시를 조성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더불어 “풍납토성 내외에서의 신축은 억제하고, 정비하여 사적으로 지정보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조사와 발굴 및 정비까지도 할 수 있는 풍납토성 발굴 전담 국립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고대왕궁 유적의 발굴과 보존 사례는 시사점을 준다. 사토 고지 나라문화재연구소 명예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은 1950년대 중반 고도성장기를 맞으며 도로·공장·주택의 신설과 개발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매장문화재도 발굴조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문화재를 지킬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체제가 낙후했고,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해 유적이 파괴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풍조가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이르면 아스카 지방의 제궁, 후지와라궁 등 도성유적이 잇따라 개발과 보존의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도성 유적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현재는) 고대 일본의 정치·경제·문화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도성유적의 조사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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