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터지면 책임 공방으로 복구 늦어
피해 클 땐 결국 정부서 세금으로 메워
사업장은 막대한 배상비로 도산 위험
구미 불산가스 유출 사고 계기로 도입
사업장 보험료로 신속하게 피해 구제
일정 규모 이상 사업장 의무 가입해야
초창기 화재보험 외 추가 비용 부담돼
환경부, 최근 자기부담률 0.1%로 완화
무사고엔 5% 할인도… 기업 부담 줄여
2012년 9월27일 경북 구미시 산동면. 추석을 앞두고 작물이 풍성하게 영글어 가는 들녘에 불산가스가 내려앉았다. 인근 산업단지에서 새어 나온 10t의 불산가스로 수확을 앞둔 벼가 말라죽고, 포도와 멜론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수백년 된 정자나무가 고사했고, 가축들은 콧물을 흘리며 사료를 먹지 않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고엽제를 뿌린 듯 마을이 초토화됐다며 공포에 떨었다. 한순간의 사고로 23명이 죽거나 다쳤고 212㏊의 농작물, 약 4000마리의 가축이 피해를 보았다.
‘한국판 보팔 참사’, ‘최악의 화학 사고’로 기록된 구미 불산가스 누출사고를 수습하는 데 국민 세금 수백억원이 투입됐다. 기업의 과실이었지만 눈덩이처럼 피해가 늘면서 정부는 사고지역을 특별재난구역으로 지정하고, 피해 복구비 554억원을 배정했다. 구미시는 사고 기업에 구상권 청구 소송을 냈고, 이 업체는 2032년까지 매년 1억5000만원과 함께 2034년까지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의 30%를 구미시에 지급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지만, 투입된 수백억원의 혈세에 비하면 적은 액수다.
구미 불산가스 누출은 환경오염 사고가 안고 있는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국민 건강과 안전에 미치는 파급력은 막대하지만 제도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으면 피해 보상은 지연되고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수십년간 피해 보상 비용을 대느라 빠듯한 경영을 이어가거나 파산에 이를 수 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처럼 10여 년이 지나서야 법정 다툼 끝에 피해 보상이 마무리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부는 구미 불산가스 사고를 계기로 신속한 환경오염 사고 수습을 위해 ‘환경책임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2014년 12월 제정된 환경피해구제법에 따라 2016년 7월부터 실시돼 올해 도입 5주년을 맞았다.
◆신속한 피해 보상·사업장 도산 방지
환경책임보험은 사업장이 미리 낸 보험료로 신속하게 피해를 구제하는 제도다. 자동차보험에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환경책임보험에 든 사업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보험으로 신속하게 피해를 보상하고, 사업장은 도산 위험에 몰리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지난 2017년 8월 석유제품 운반 선박의 저장탱크에서 중질유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주입 호스의 연결부위 파손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급히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바다에는 200L의 기름이 쏟아진 후였다. 예전 같으면 회사가 모든 비용을 들여 기름을 제거하거나 책임 공방으로 시간이 지체됐겠지만 환경책임보험에서 지급된 2억2000만원으로 사고를 신속하게 수습할 수 있었다.
환경책임보험은 유해물질을 많이 취급하는 대기·수질·토양·해양 관련 사업장 가운데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인 곳은 의무 가입해야 한다. 그런데 사고 규모가 크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인식 때문에 제도가 도입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환경산업기술원이 펴낸 ‘환경책임 및 피해구제 제도’에 따르면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사고, 1995년 씨프린스 원유 유출사고 등 대형사고 때마다 환경 피해 구제를 위한 법안 발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들 간의 합의가 지연돼 국회 회기가 끝나면 자동 폐기되곤 했다.
2016년 환경책임보험 출범 초기에도 사고 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사업 참여에 부정적인 보험사가 많았다. 그러나 보험금 손해율이 140%를 초과하는 손해는 환경부가 책임지도록 하고 보험료 산출 근거 등도 다듬으면서 제도 초기 3곳이었던 취급 손해보험사는 5곳으로 늘었다.
또, 일부 사업장에서 보험료를 적게 내기 위해 인허가 받은 오염물질을 조작·누락하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는 사업장 위험평가를 통해 적정한 보험 가입을 유도하고 있다. 위험도가 높은 유해물질을 낮은 위험물질로 대체하거나 배출·취급량을 줄이면 보험료를 낮춰주기도 한다.
피해자가 제도를 몰라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없도록 환경책임보험 제도의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한 교육과 홍보도 진행 중이다.
◆미국·유럽은 수십년 전 도입… 한국도 98% 가입률 기록
미국이나 유럽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환경책임보험을 운용해 오고 있다. 한국에 구미 불산사고가 있었던 것처럼, 모두 제도 도입에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미국은 1970년대 후반 이른바 ‘러브커낼 사건’이 방아쇠가 됐다.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마을 러브커낼에서 화학회사가 어마어마한 양의 유해 폐기물을 불법 매립해 마을에서 기형아 출산이 늘고 심장병과 암에 걸린 환자가 급증한 사건이었다. 이 일로 미 의회는 오염된 토지를 신속하게 효과적으로 정화해 그 비용을 책임 당사자에게 부과하는 ‘종합환경대응보상책임법(CERCLA)’을 제정했다. 천재지변이나 전쟁, 제3자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닌 한 모든 오염에 대해 사업장이 책임지도록 하고, 사업장 측에 지불 능력이 없으면 ‘슈퍼펀드’라고 하는 기금을 활용한다.
독일은 창고 화재로 벌어진 라인강 오염사건 이후 1991년 ‘환경책임법’을 제정했다. 환경을 오염시킬 위험이 있는 사업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자가 고의나 과실 여부를 불문하고 배상책임을 지며, 이를 위한 재무적 수단을 갖춰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2007년에는 ‘환경손해법’이 제정됐는데, 환경사고 후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시민과 환경단체가 소송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은 이들 국가에 비해 도입 시기는 늦지만 지난해 기준 전국 의무가입 사업장 1만4470곳 중 휴·폐업을 뺀 1만4102개 사업장(97.5%)이 가입해 제도가 빠르게 안착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기존에 가입하던 화재보험 외에 추가 비용이 드는 만큼 부담스럽다”는 업체 측 의견이 많았다.
환경부는 이런 의견을 수렴해 최근 보완책을 발표했다. 먼저 사고 발생 시 사업장이 부담해야 할 자기부담률을 최고 보상한도액의 0.5%에서 0.1%로 완화했다. 2016년부터 최근까지 환경책임보험금 지급이 신청됐으나, 지급되지 않은 42건 가운데 자기부담금보다 손해액이 낮아 지급되지 않은 경우가 24건(57%)이었다. 그러나 개정된 자기부담률을 적용하면 미지급 24건 가운데 22건은 지급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에 따라 사업장의 배상금 부담도 완화됐다. 예를 들어 30억원 보상한도의 환경책임보험을 가입한 사업장의 경우 자기부담금이 1500만원(보상한도의 0.5%)에서 300만원(0.1%)으로 줄어든다.
또, 일반 화학물질 누·유출 피해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요율을 신설했다. 그동안에는 유해 화학물질이 아닌 일반 화학물질 유출로 피해가 발생하면 환경책임보험에서 피해자 배상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일반 화확물질 요율이 적용되면 보험료가 평균 3.3만원가량 인상되지만, 보험을 통해 신속한 배상이 가능해진다.
이 밖에 최근 3년간 사고가 나지 않은 무사고 사업장에는 할인율(5%)을 적용하는 등 환경안전관리가 양호한 시설은 보험료 할인 혜택이 기존보다 두 배(10%→20%)로 늘어난다. 환경오염사고 배상 청구가 가능한 기간도 보험기간 만료 후 60일에서 1년까지로 확대된다.
환경부 관계자는 “이번 요율 개정은 환경책임보험 제도를 도입 취지에 맞게 피해자와 사업장에 모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개편한 것”이라며 “제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보험업계 및 산업계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것”이라고 전했다.
윤지로·박유빈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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