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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희의 뮤직칼럼] 전인권, 들국화 향기에 취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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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1-20 14:36:03 수정 : 2013-12-05 17: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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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은 1954년 9월4일 인쇄소를 했던 부모님 덕에 넉넉한 집안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전인권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가족 곁을 떠났고, 후에 KBS PD가 된 큰형 전세권 역시 집을 나가는 바람에 전인권은 어머니, 작은 형과 함께 살았다.

평범하지 못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인지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던 전인권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도 끝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해지는 석양을 바라보다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 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저 석양은 나를 깨우고/ 밤이 내 앞에 다시 다가오는데…(전인권의 곡 ‘사랑한 후에’ 가사 중)

말수도 적어 자기 뜻을 표현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 그의 유일한 위로는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그림에 빠져 지내는 전인권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노력한 건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준 작은 형이었다.

훗날 전인권은 “당시 (작은 형이) 무척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맞을 때 목청껏 비명을 질러서 오히려 발성 연습이 된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노래 시험을 볼 때면 반 아이들이 놀랄 만큼 유독 큰 목청을 자랑했다. 하지만 당시 그림이 좋았던 전인권은 명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공부보다는 그림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규율부 학생들과 싸움이 붙은 전인권은 그 길로 자퇴를 하고 가출을 시도했다. 스케치북과 색연필, 라디오를 들고 만리포 바닷가로 향한 그는 비틀즈의 ‘헤이 주드’와 ‘이매진’을 듣고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18세 되던 해, 작은 형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게 된 전인권은 그 순간 만리포에서 혼자 들었던 비틀즈의 음악을 떠올렸다. 바로 그 때 전인권은 그림이 아닌 음악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대학교 영문과에 다니던 작은 형 덕에 어려서부터 팝송을 많이 접했던 전인권은 레드 제플린의 음악에 심취하게 된다.

청년 전인권은 주로 집 근처인 삼청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 전인권의 모습은 동네 주민들에게 자주 목격됐고,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남학생들 뿐만 아니라 인근 여고생 팬까지 생기자 조금씩 외모도 꾸몄다고 한다.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 스타일로 머리를 기르더니, 도수 높은 안경으로 예사롭지 않은 예술가의 분위기를 내기도 했다.

20대 초반, 자신이 서야 할 무대에 대한 고민은 삼청공원, 서울 명동의 쉘브르를 거쳐 전국 방랑으로 이어졌다. 전인권이 부산 극동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을 때, 작은 형이 방위소집 영장을 들고 나타나 서울로 끌려온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몇 개월 후 전인권은 가발을 쓴 채 ‘꽃잎’이라는 레스토랑에서 다시 노래하고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아르바이트 삼아 노래했는데, 당시 함께 듀엣으로 노래했던 윤인섭은 훗날 방송 연예 PD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결국 1979년 그 동안의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청산하고 이주원, 강인원, 나동민 등과 함께 ‘따로 또 같이’라는 그룹에 참여해 1집 ‘맴도는 얼굴’로 가요계에 정식으로 입문한다. 하지만 전인권의 음악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전인권은 “마스터 테이프를 없애려고 녹음실에 몰래 찾아가 불을 지를까도 생각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0년대 초, 전인권은 밤무대에서 함께 일했던 기타리스트 함춘호의 소개로 만난 허성욱(키보드)과 조덕환(기타), 한춘근(드럼, 1984년 백두산 멤버가 됨)과 함께 ‘동방의 빛’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과 음악적 성향이 맞는 멤버를 만나는 일이 절실했다. 그 때 뮤지션들은 대부분 포크의 성향이 강해서 사랑노래 일색인 문화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서울 이화여대 입구에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종종 모이는 ‘모노’라는 음악카페가 있었다. 이곳에서 최성원(베이스)을 만나게 되고, 백두산 멤버가 된 드러머 한춘근 대신 주찬권이 가세하면서 전인권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 주찬권 등 다섯 멤버가 주축이 된 ‘들국화’의 항해가 시작됐다.

1985년 1월 발매된 들국화 1집은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첫 발매 후 14년이란 시간이 흐른 1999년, 들국화 1집은 21명의 음악 산업 관계자들이 참여해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세계로 가는 기차’ ‘매일 그대와’ 등 수록곡들은 여전히 젊은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명곡들로 남아 있다.

포크 성향에 감수성 짙은 음악을 선호했던 최성원과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젊은이들의 삶을 노래하고 싶었던 록커 전인권의 음악적 스타일은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멤버의 교체와 음악의 방향성에 대한 마찰 등으로 파열음이 새나왔지만 들국화 공연장에는 언제나 관객들이 넘쳐났다.

들국화가 대중음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높아질수록 팀워크는 날로 약해지고 있었다. 멤버들이 워낙 개성이 강했던 탓에 매번 싸우고 풀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1986년 들국화 2집 앨범을 발표할 당시에는 멤버 구성이 바뀌어 있었다. 1집이 나온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기타리스트 조덕환의 빈자리를 최구희(기타)와 손진태(기타, 신디사이저)가 메웠다. ‘제발’ ‘내가 찾는 아이’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등도 대히트를 했다.

하지만 두 음반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1987년 여러 악성 루머들이 난무한 가운데 전인권은 인터뷰를 통해 들국화의 ‘잠정 해체’를 알렸다. 당시 그는 “나는 록, 최성원은 포크, 주찬권은 브리티시 록, 손진태는 재즈를 하기 위해 들국화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1집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 조덕환을 비롯해 캐나다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떠난 허성욱. 그리고 얼마 전 안타깝게 사망한 주찬권까지. 여러 가슴 아픈 일을 겪으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들국화 멤버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들국화의 빈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확신으로 다시 뭉쳤다. 올 연말 원년 멤버들이 다시 모여 새 앨범을 발표한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들국화의 끈을 놓지 않았던 원년 멤버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은 결국 한 배를 타지 못했다. 주찬권이 없는 들국화의 아름다운 여행이 비록 외로울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무심했던 대중의 사랑이 그 빈자리를 채워 함께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가수 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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