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고립/자신의 뜻 강요… 거침없는 숙청
필립 쇼트 지음/양현수 옮김/교양인/2만9000원 |
신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천재적 영도력으로 중국을 구원한 혁명의 별인가, 수천만 인민을 죽음으로 끌어들인 냉혈한인가. 영국 BBC의 베이징 특파원으로 20여년을 지낸 필립 쇼트(73) 기자가 쓴 이 책에는 마오쩌둥에 관한 최신 자료가 망라되었다. 러시아와 중국의 접근 가능한 문서고에서 구입한 자료를 토대로 썼다. 1, 2권 16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책이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저지하며 문화혁명의 사상 투쟁을 지휘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과 함께 공산주의 혁명의 꿈이 사라질 것으로 예감했다. 마오의 예측은 정확했다. 1979년 12월 28일 새 지도자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 개방을 선언하며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신중국은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지금 누구도 중국을 사회주의 국가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오의 혁명은 실패한 것인가.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열성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마오가 청년 시절 몰입한 사상은 무정부주의(anarchism)였다. 쓰러진 거인 청과 대혼란의 중국대륙은 암울했다. 그는 ‘폭력 없는’ 자치 운동을 벌이며 중국이 거듭날 길을 모색했다. 근대주의자 천두슈, 량치차오를 따랐지만 별다른 희망을 찾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유일한 개혁 방법은 ‘러시아식 혁명’이었다.
마오쩌둥은 현실에 밀착한 지도자였다. 그는 결코 혁명 이론의 이상주의에 빠져 무모한 군사 작전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가 만든 공산당 홍군은 목표의식으로 뭉친 단결된 군대였다. 반면 국민당군은 전투 의지가 전혀 없는 최악의 군대였다. 장제스 휘하의 지휘관들은 그저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을 뿐 희생하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징집된 국민당군은 짐승처럼 취급당했던 탓에 짐승같이 행동하기 일쑤였다.
저자는 책에서 “혁명가 마오는 뛰어난 현실 감각과 투철한 이상 추구 사이에서 모순되는 인물”이라면서 “계급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붉은 황제였지만 혁명의 이상에 갇힌 수인”이라고 해석한다. |
그러나 1949년 신중국 건국 이후 마오는 점차 베이징에 고립되어 현실과 멀어졌다. 동지들과 인민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자신의 노선에서 벗어날 경우 거침없이 숙청을 자행했다.
이 결과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초래해 수천만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만년에는 최측근조차 마오를 믿지 못했다. 두루뭉술한 태도로 동료들의 결정을 지켜보며 평가하곤 했다. 마오는 오랜 혁명 동지인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펑더화이, 린뱌오, 덩샤오핑 등 동료들을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했다. 그는 아랫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기를 기대했던 몽상가와 비슷해졌다.
저자는 “마오는 죽었지만, 육체는 죽지 못한 채 미라가 되어 톈안먼 기념관에 있다. 영원히 살고 있는 것은 마오의 육체만이 아니다. 그의 사상과 이미지도 살아남아 현대 중국을 떠받치고 있다”고 풀이한다. 그러면서 “마오는 스탈린처럼 화장되는 비극은 당하지 않았다. 중국은 여전히 마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해석했다.
지난해 12월 28일 시진핑 주석은 ‘개혁 개방 40주년 기념식’에서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한다”고 천명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1940년대부터 강조하고 문화혁명기인 1962년 공식화한 표현이다. 혁명의 시대는 갔을지언정 마오의 시대는 이어지고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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