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서 종전선언 제안 되풀이
같은 날 미사일 쏘며 긴장 고조
희망메시지에 평화 깃들지 않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이렇게 남북 정상이 나란히 유엔총회 무대에 서는 꿈을 꿨다.”
얼마 전 만났던 정보당국 관계자가 했던 말이다. 남북 정상의 유엔총회 동시 참석은 문재인정부가 물밑에서 추진해온 남북관계 개선 비밀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특히 올해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30주년이 되는 해다. 정부 바람대로 남북 정상이 유엔총회에 동시 입장했다면 이전 북·미 정상회담을 뛰어넘는 세계적 이슈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회담의 ‘굴욕’ 탓인지, 아니면 바이든 행정부와의 비핵화 셈법이 미처 정리되지 않은 때문인지 김 국무위원장의 유엔총회 등장은 불발됐다.
김 위원장을 대신한 문 대통령의 유엔총회 동행 파트너는 ‘미래 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로 임명된 BTS(방탄소년단)였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 걸까. 문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기를 제안한다”며 종전선언을 촉구했다. 유엔총회에서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 카드를 꺼내 든 것은 2018년과 2020년에 이어 세 번째다. 차이점이라면 종전선언의 주체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 되풀이된 종전선언은 퇴임 8개월을 남겨두고서다. 남북 군비경쟁의 모순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현실성은 떨어진다. 이미 북·미 간 하노이 노딜 후 사실상 ‘용도폐기’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30주년(17일)과 평양공동선언 3주년(19일) 등 역사적 모멘텀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려던 문 대통령의 구상은 스텝이 꼬였다.
여권 인사들마저도 사석에서는 ‘무능하다’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문재인정부의 실정은 적지 않다. 부동산 문제를 비롯해 언론중재법 강행 시도에서 드러나듯이 오만과 독선으로 점철됐다. 그나마 내세울 수 있었던 게 남북관계였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꽃피운 남북화해 물결은 역대 정부를 뛰어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청와대는 지난달 한·미 연합훈련을 빌미로 북측이 비난을 퍼부을 때도 미국·중국과의 협의를 통해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공들였다.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남북이 같은 날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긴장이 한층 고조된 모양새다. 북한은 지난 11일과 12일 장거리 순항미사일을, 15일 탄도미사일을 각각 발사했다. 15일에는 우리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시험발사했다. SLBM 발사시험 직후 북한 김여정 부부장이 문 대통령을 직접 거론하며 비난 담화까지 내놨다. 겁박에 끊긴 남북통신선 복구조차 입에 올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제 나라 안 사정은 온통 대선 경선 국면에 눈과 귀가 쏠렸다. 남북관계는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분위기다. 설상가상 나라 밖도 문 대통령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6일 온라인에 게재한 ‘북한의 핵 유혹-평양의 핵개발 저지는 채찍과 당근 모두 실패했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퇴임을 앞둔 문 대통령은 김정은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이 ‘인도적 원조’를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CNN은 16일 북한이 평북 영변의 우라늄 농축 시설을 확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만약 이 공간을 모두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로 채우면 핵무기 제조에 쓰이는 고농축 우라늄을 25%가량 더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20일 열린 제65차 IAEA 총회에서 북한이 핵 프로그램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평가와 함께 “북한의 핵 프로그램 지속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관련 결의를 명백히 위반하는 것으로 매우 유감스럽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외침이 공허해 보이는 이유다. ‘평화 쇼’에 대한 대통령의 집착을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됐다. 북한 핵은 그대로 두고 희망 메시지만 남발한다고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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