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웨이, "한국에 자네가 꼭 필요" 부탁
"당장 가겠다"… 부임 20여일 만에 전사
지금으로부터 꼭 71년 전인 1951년 2월 24일 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1월만 해도 북한 땅을 거의 다 점령해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는 듯했던 미군 등 유엔군이 중공군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인해전술에 밀려 도로 38선 이남으로 후퇴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이에 유엔군은 대대적 반격을 통해 1·4 후퇴로 빼앗긴 수도 서울을 되찾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비장한 각오로 이른바 ‘킬러(Killer) 작전’에 돌입했다.
유엔군사령부는 2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킬러 작전 수행 도중 목숨을 잃은 미 육군 브라이언트 무어(1894∼1951) 장군을 추모하는 글과 사진을 게시했다. 당시 소장 계급장을 달고 미 육군 제9군단을 지휘했던 무어 장군은 1950년 12월 전사한 미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당시 중장)과 더불어 6·25전쟁 도중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 최고위급 미군 장교에 해당한다.
킬러 작전의 핵심은 미 9군단이 남한강을 안전하게 건너 신속히 서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유엔사에 따르면 무어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및 유럽 전선에서 모두 활약한 백전노장답게 직접 헬리콥터를 타고 남한강변의 전투지형 순찰에 나섰다. 그는 위협을 무릅쓰고 조종사한테 “좀 더 낮게 비행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지상의 지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당시 남한강변에는 전기 공급을 위해 부설한 고압의 송전 케이블이 있었다. 고도를 낮추던 헬기가 그만 이 케이블에 걸렸고 오늘날의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 강천보 부근에 추락하고 말았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겨울 강물 속에서 사투를 벌인 무어 장군은 결국 몇 시간 뒤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였다. 유족으로 미국에 부인과 두 딸을 남겼다.
무어 장군은 미국 북동부 메인주(州)가 고향이다. 1차대전 도중인 1917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 당시 미 8군사령관,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 이은 제2대 유엔군 사령관을 차례로 지낸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그의 육사 동기생이다.
유엔사는 1951년 1월 육사 교장으로 재직하던 무어 장군한테 연락을 취한 리지웨이 장군이 “지금 한국에 자네가 꼭 필요하다. 오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라고 요청하자 무어 장군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At once)”라고 답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무어 장군이 9군단장에 부임한 것이 1951년 1월 30일의 일이니 한국 땅을 밟은 지 1개월도 채 안돼 불귀의 객이 된 셈이다. 훗날 미 8군 공병대는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무어 장군의 넋을 기리고자 고인의 추락 지점인 남한강 강천보 부근에 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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