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거래를 하면서 물품을 산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대금을 지급하는 일은 흔합니다. 이처럼 기존 채무의 이행에 관하여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어음을 교부할 때 당사자의 의사는 기존 원인채무(물품대금 채무)의 지급에 갈음하여, 즉 기존 원인채무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어음채무만 존속시키려고 하는 경우와 기존 원인채무를 존속시키면서 그에 대한 지급방법으로서 이른바 ‘지급을 위하여’ 교부하는 경우 및 단지 기존 채무의 지급 담보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담보를 위하여’ 교부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어음상의 주채무자가 원인관계상의 채무자와 동일하지 아니한 때에는 제3자인 어음상의 주채무자에 의한 지급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원인관계상의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교부한 어음은 원인채무의 ‘지급을 위하여’ 교부된 것으로 추정되고, 이처럼 기존의 원인채무와 어음상의 채무가 병존하면 어음금이 지급되는 등의 이유로 채무자가 그 어음상의 상환 의무를 면해야 비로소 기존 원인채무도 소멸하게 됩니다.
즉 매수인이 매도인에게 물품대금으로 현금 대신 ‘갑’(甲)이 발행한 어음을 교부한다면 그 어음은 물품대금 지급을 위하여 교부된 것으로 추정되고, 어음의 교부만으로 매수인의 물품대금 채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도인이 갑으로부터 어음금을 실제로 변제받는 등으로 인하여 매수인의 어음상 채무가 소멸하면 그때야 그의 물품대금 채무도 함께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원인채무의 소멸 원인이 된 갑의 어음금의 변제행위가 있은 직후 갑에 대한 회생절차가 개시되었고, 갑의 관리인이 위 어음금의 변제행위에 대하여 부인권을 행사하여 그 결과 매도인이 갑에게 원상회복으로서 위 어음금 상당액을 반환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매도인은 어음금 지급으로 소멸하였던 매수인의 물품대금 채무가 되살아났다고 주장하면서 매수인에게 다시 물품대금 채무의 변제를 청구할 수 있을까요?
먼저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하 채무자회생법) 제109조 제1항은 “채무자의 행위가 부인된 경우 상대방이 그가 받은 급부를 반환하거나 그 가액을 상환한 때에는 상대방의 채권은 원상으로 회복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매도인이 갑에게 어음금 상당액을 반환한 이상 갑의 어음금 변제로 소멸한 매도인의 물품대금 채권이 회복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인권 행사의 효과는 채무자의 관리인과 부인의 상대방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발생할 뿐 제3자에 대하여는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인데, 매도인의 물품대금 채무의 채무자인 매수인은 회생채무자의 관리인도 부인의 상대방도 아닌 제3자라는 점에 착안하여 갑의 관리인의 부인권 행사로 인하여 제3자 매수인에 대한 매도인의 채권이 부활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최근 대법원은 위와 유사한 상황에서 매도인이 매수인을 상대로 물품대금의 지급을 청구한 사건에서 채무자회생법 제109조 제1항과 관련하여 “부인에 의해 회복되는 상대방의 채권은 부인된 행위의 직접 대상이 된 채권에 한정되지 않고, 그 채권의 소멸로 인해 함께 소멸했던 보증 채권이나 보험금 채권 등 다른 채권도 포함될 수 있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또한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원인채무의 지급을 위해 어음을 배서양도한 경우 원인채무와 어음상 채무가 병존하고 있다가 나중에 어음금이 지급되어 어음상 채무가 소멸하면 원인채무도 함께 소멸한다. 이러한 경우 어음금 지급행위가 부인되어 어음소지인인 상대방이 어음금을 반환한 때에는 채무자회생법 제109조 제1항에 따라 소멸했던 어음상 채권이 회복되고, 어음상 채권의 소멸로 인해 함께 소멸했던 원인채권도 회복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2022. 5. 13. 선고 2018다224781 판결).
결국 대법원은 부인권의 효과가 피고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이유 등을 들어 부인권 행사로 회복한 물품대금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원심 판결의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이 사건을 원심 법원에 환송하였습니다.
채권자(물품의 매도인)에 대한 어음금 채무 변제행위가 부인되어 그 변제의 효력이 소멸한 이상 변제로 인하여 소멸하였던 채권은 부인권 행사의 상대적 효력과 무관하게 어음금 채무가 변제되기 전과 같이 부활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대법원의 입장이 타당하다고 판단됩니다.
거래 상대방의 회생·파산에 따라 부인권 행사로 기존 거래관계가 불안정해지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적어도 기존 채무의 지급을 위하여 어음을 받았다 어음금 지급행위가 부인된다면 다시 기존 채무의 채무자에게 변제를 청구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고, 권리 행사에 참고하기 바랍니다.
법무법인 바른 정현지 변호사 hyunjee.chung@barun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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