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방한한 엘리자베스 2세 당시 영국 여왕은 한국인들로부터 그야말로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오죽하면 ‘한국이 영연방 회원국인 줄 알았다’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 우리 외교부는 “1883년 한·영 양국이 수교한 지 100여년 만에 처음 이뤄진 영국 국가원수의 방문으로서 한·영 외교사에 있어 큰 획을 긋는 행사”라고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외국 정상의 방한 때 대통령이 공항에서 영접하는 관행이 진작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직접 경기 성남 서울공항까지 마중을 나가는 파격 의전까지 선보였으니 우리 정부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1926년생인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부친인 조지 6세 국왕의 갑작스러운 별세에 따라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왕좌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군사·경제 강대국으로서 영국의 위세는 대단했다. 미국, 소련(현 러시아)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3대 전승국의 일원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 중 하나였다. 더욱이 세계 50개 이상의 나라들을 회원국으로 거느린 영연방(Commonwealth)의 수장인 만큼 외교적 영향력도 컸다. 엘리자베스 2세가 어느 나라를 방문하든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시선을 끈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수십년이 흘러 오늘날 영국의 힘은 예전 같지 않다. 미국·중국·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분류한다면 영국의 국력은 분명히 그보다 한 단계 아래다. 2022년 9월 엘리자베스 2세가 타계하고 그의 아들 찰스 3세가 후임 국왕이 된 뒤로는 영국 왕실을 보는 시선 또한 따가워졌다.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삶을 산 엘리자베스 2세와 달리 찰스 3세는 불륜, 이혼 그리고 불륜 대상과의 재혼 등 사생활에 불미스러운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물론 영국 국왕을 자국 국가원수로 섬기는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도 ‘시대 착오적인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이니 찰스 3세로선 고심이 깊을 수밖에 없다.

현재 76세의 고령으로 암 투병 중인 찰스 3세가 7일부터 10일까지 3박4일 일정의 이탈리아 국빈 방문 일정을 소화했다. 애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시티 국빈 방문도 예정돼 있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건강이 악화함에 따라 그냥 찰스 3세 부부와 교황의 비공개 만남으로 축소됐다. BBC 방송을 비롯한 영국 언론들의 대대적인 보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국민은 영국 왕실이나 찰스 3세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로마에 거주하는 한 60대 여성은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로마는 앞서 수많은 황제들(emperors)이 거쳐간 곳인데 일개 왕(king)이 뭐가 흥미롭겠느냐”며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국 왕실로선 과거 대영제국의 영광을 떠올리며 아쉬워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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