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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뤼순감옥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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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3-27 02:57:21 수정 : 2010-03-27 02: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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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평화… 그날의 외침 들리는 듯
숭고한 뜻 찾아 南北·中·日 추모객 발길 줄이어
“동양평화사상은 동아시아人을 하나로 모이게 해”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대한독립의 소리가 들려 오면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푸른 하늘이 되레 서러운 26일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시의 뤼순(旅順)구 일대에 100년 전 안중근 의사가 최후로 남긴 유언이 참배객들의 가슴에 울려퍼졌다. 안 의사가 남기고 간 숭고한 뜻을 찾아 남과 북, 중국, 일본에서 참배객이 줄을 이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인 26일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관계자들과 추모객 등이 안 의사 재판이 열렸던 뤼순의 옛 일본관동법원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뤼순=김용출 기자
다롄 중산광장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뤼순 남로 등을 따라 자동차로 1시간여 달리자, 높고 붉은 담이 쳐진 옛 일본 관동도독부 뤼순감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전 10시 홍일식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장과 중국의 린젠(林堅) 인민대, 두원총(杜文忠) 서남민족대, 일본의 사사가와 노리가츠(笹川紀勝) 메이지(明治)대 교수 등 한·중·일 3국 참배객 20여명이 5m 높이의 담장과 철조망, 빨간 벽돌건물 사이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50, 60m 떨어진 본관동 밖 간수 당직실 옆에 회색 독방이 나타났다. 안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뒤 11월3일부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갇혀 있던 곳이다.

독방 건물 외벽에는 안 의사의 독방임을 표시하는 동판이 걸려 있었다. 감방 안에 놓은 책상에는 동생과 면회하는 사진이, 먹과 벼루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안 의사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관동도독부 고등검찰관 미조부치 다키오와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생각이 무지하고 천박하고 편협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미조부치의 비판에 안 의사는 “나 일개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한국 2000만 동포의 대표로서 결행한 것”이라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다”고 당당히 맞섰다. 안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썼고 ‘동양평화론’을 일부 집필했다. 독방에서 10여m 떨어진 기념관 옆 사형장. 교수형 때 쓰는 밧줄이 늘어져 있었는데, 당시보다 약간 낮게 돼 있다고 한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

참배객 사이에서는 안 의사가 묻힌 곳을 찾아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홍 이사장은 “일제가 안 의사를 국사범으로 여겨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날 박진(한나라당), 박상천(민주당) 등 국회의원과 북한 측 천주교인 6명과 함께 온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 중국인들 말고 일본 사람들도 삼삼오오 이곳을 찾았다.

◇26일 안중근 의사가 교수형을 당했던 뤼순 감옥 사형장 교수대 의자 위에 안 의사의 사진이 놓여 있다.
뤼순=김용출 기자
사형 선고 직후 “일본국 4000만 민족이 ‘안중근의 날’을 외칠 날이 머지않을 것”이라고 말한 안 의사의 생각이 100년 만에 이뤄지는 듯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사형장 앞에서 “오전에 정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장 등 북측 인사들과 함께 공동미사를 올리고 이곳을 찾았다”며 “안 의사 정신이 한·중·일 3국은 물론 북한 사람까지 하나로 모이게 했다”고 가슴 벅차했다.

뤼순감옥에서 직선거리 200m쯤 떨어진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1호 법정. 안 의사가 1910년 2월7일부터 재판받은 곳으로, 중국 시립병원으로 바뀐 것을 여순재단이 사들여 법정 모습을 재현했다.
안 의사는 법정에서 “내가 이토를 죽인 건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한국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행한 것”이라고 외쳤다. 사형 선고에도 당당하게 의거 이유를 밝혔다.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는 영국 ‘더 그래픽’지의 묘사가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해 준다. 석양은 하늘에서 떨어졌건만 참배의 발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박귀언 여순재단 상임이사는 “동양평화와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한 안 의사 사상이 100년 만에 동아시아의 메아리로 부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뤼순=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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