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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르고 깊게 유장하게 흐르는 우리 역사의 흐름에 거지왕자가 있었다.

고구려의 乙弗은 어린 날 큰 아버지인 봉상왕이 동생인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마져 죽이려하자 궁을 빠져 나왔다. 자객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숨소리조차 못낸 채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그림자. 손에 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세상물정을 하나도 모르고, 오로지 혼자 내팽개쳐진 어린아이는 그 후 세상을 떠돌아니며 걸식을 한다. 다른 왕자들이나 귀족들 자제처럼 뜻을 세우고 번듯하게 출가하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주유천하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고행이었다.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해 1년 반 만에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시 동촌 사람인 재모와 더불어 배를 타고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소금장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못된 노파를 만나 결국은 관에 끌려가 매를 맞고 나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극심한 고생을 하면서 몇 년을 숨어 지냈다. 그런데 봉상왕이 포악하고 실정을 거듭하자 신하들은 왕을 가두고 을불을 모셔 온 후에 국새를 올리고 왕위에 오르길 간청했다. 그 을불이 바로 고구려 15대 미천왕이다.

한 인간의 가치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자기가 겪었던 경험, 얻은 지식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특별히 어린 날의 기억, 충격적이고 특별한 경험은 그 사람의 일생을 걸쳐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종교인이라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인간을 제도하는 포교방법을 배울 것이요, 예술가라면 창작의 소재나 주제로 삼을 것이고, 장사꾼이라면 물건을 선택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아 파는 요령을 터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이라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터득했고, 정책을 세우고 추진하는 전략을 찾아냈을 것이다.

미천왕 또한 그런 경험들이 국가발전 정책을 세우고 추진하는데 활용했을 것이 틀림없다. 미천왕은 즉위한지 3년째 되던 젊은 나이에 3만명의 군사로서 현도군(玄兎郡)을 공격하고, 사로잡은 포로 8000명을 평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10년 쯤 지나 다시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지금의 단동시)을 점령한다.

서안평은 고구려가 서해를 통해 중국지역과 교류할 수 있는 일종의 출구이었고, 국가항구를 설치해야만 하는 전략거점이다. 이미 동천왕 때 양자강 하구에 있는 손권이 다스리던 오나라와 교류한 항구도 서안평(西安平)이었다. 뿐 만 아니라 서안평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국지역과 한반도 중부에 있는 중국세력들이 정치 군사 무역을 하는 황해북부 연근해항로의 중간 거점이었다. 그래서 늘 서안평을 놓고 전쟁이 벌어졌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위나라 장군인 관구검의 침입은 이러한 국제질서의 한 과정에서 고구려가 차지한 압록강하구를 탈취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미천왕은 서해북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가장 중요한 항로의 목을 차지했으므로 2년 후에 잔재로 남아있는 낙랑을 완전히 쫓아내고, 다시 다음해에는 대방(帶方)마져 멸망시켰다. 낙랑과 대방은 이미 중국지역과 이어지는 항로가 막혀 말라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요동을 장악한 燕나라를 견제하려고 해로를 이용하여 화북지방의 후조의 왕인 석륵에게 사신과 군수물자인 楛矢(싸릿대 화살)를 보내어 동맹을 맺는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해양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깨달았고, 남쪽에 남아있는 낙랑과 대방을 없애려면 우선 항로를 막아 고사시키는게 가장 좋은 방법임을 깨달았다. 압록강과 서해를 오고가는 해상노릇을 하면서 해양력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았고, 또 여러 해상세력들의 도움을 받아서 서해 해양문화의 메카니즘과 복잡한 물길, 전략적 요충지들을 정확하게 간파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효율적인 군사작전을 개시하고, 외교와 무역에도 활용했을 것이다. 그의 해양정책이나 해양군사작전의 전술을 조언하는 참모가운데에는 해상호족이거나 혹은 해적출신도 있었을지 모른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는 죽은 후에도 평탄하지 못했다.

살아 생전에 숙적이었던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자신의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은 부인과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아들인 고국원왕은 이러한 국난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역시 해양을 활용하고 남진정책을 중요시했으나 그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전장에서 백제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는 비운을 당했다. 하지만 미천왕의 증손자로 광개토태왕이 역사에 등장했고, 그는 마침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선대 이래의 뜻을 이루어 고구려를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장악한 해륙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당장은 실패하거나 무모해보일지 몰라도 역사적인 인간들이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미래를 예측한다면 실패라는 경험을 퇴비로 삼아가며 계속 가꾼다가 때가 성숙하면 화려한 꽃망울과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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