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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치국 모두 성공한 '영원한 인민총리' 저우언라이

입력 : 2008-04-14 18:13:54 수정 : 2008-04-14 18: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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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중국, 저우언라이 탄생 110주년 맞아 추모열기 뜨거워 “생산을 하지 않고, 건설을 하지 않으면 인민은 뭘 먹고, 뭘 씁니까? 그러고서 무슨 혁명이 가능합니까?”

중국 대륙에 문화대혁명 광풍이 불던 시절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가 했다는 비판이다. 저우언라이의 ‘인민 중심’ 철학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말이다. 그는 1976년 사망했지만 생전의 청빈한 삶과 근면 성실한 공직 생활로 지금도 ‘영원한 서민 총리’로 불리며 중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중국의 국회 격인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개막된 지난 5일은 저우언라이가 태어난 지 꼭 110년이 되는 날이다. 중국 대륙은 지금 저우언라이 탄생 110주년을 맞아 추모 열기가 뜨겁다. 지난달 29일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등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행사가 열렸다. 지난해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 10주기 행사가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죽은 저우언라이는 살아 있는 중국 지도부를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다. 원 총리는 현장 위주의 정치 행보로 ‘제2의 저우언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후 주석은 새해를 하루 앞둔 지난해 12월31일 톈진(天津)의 저우언라이·덩잉차오(鄧潁超·저우언라이의 아내)기념관을 방문했다.

민생을 화두로 삼은 후진타오 정부에 저우언라이만한 본보기가 없는 것이다. 후 주석은 당시 “(당정) 간부들은 저우언라이 동지의 근정애민(勤政愛民·직무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함), 극기봉공(克己奉公·사익을 극복하고 공익을 위해 봉사함), 국궁진췌(국사에 진력함)의 숭고한 정신을 배워 국민을 위해 전력을 다하라”고 강조했다. 후 주석의 정책 이념 중 하나도 바로 ‘인민을 근본으로 삼는다(以人爲本)’는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는 제네바 회담에서 자신의 외교철학을 설파하면서 국제 외교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저우언라이는 국운이 기울던 1898년 지금의 장쑤(江蘇)성 화이안(淮安)시인 화이안부(府) 산양현(山陽縣)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인 1912년 홀로 동베이(東北·만주) 지역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났고, 이곳에서 중국의 망국 위기를 목격하며 애국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만약 이때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면 집에 남아 있던 형제들처럼 비극적인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농업 현장을 시찰하는 저우언라이(가운데).

저우언라이는 이듬해 당시 톈진의 명문학교인 난카이(南開)학교(현 난카이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톈진에서 반 위안스카이(袁世凱)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에 적극 나섰다. 인생의 반려자이자 혁명동지인 덩잉차오도 이곳에서 만났다. 그래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톈진에는 저우언라이·덩잉차오기념관이 서 있다. 매일 1000여명의 시민·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는 1917∼1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톈진으로 돌아와 5·4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됐고, 석방된 뒤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영국, 독일 등을 넘나들며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을 결성하고 1921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립되자 파리지부를 설립했다. 이때 키운 국제적인 안목은 부드러운 사고의 정치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저우언라이와 부인 덩잉차오.

그는 1924년 제1차 국공합작(국민당·공산당의 항일통일전선)이 이뤄지자 귀국해 황푸(黃浦)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혁명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저우언라이는 그해 8월1일 주더(朱德) 등과 함께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현재 중국은 난창 봉기가 일어난 8월1일을 건군기념일로 삼아 기리고 있다. 1934년부터 시작된 장정(長征)에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참여하면서 혁명의 신화를 만들어갔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주의 혁명사에서 마오쩌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웅인 셈이다.

중국 현대사에서 혁명 영웅은 적지 않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능력을 발휘해 지금까지 존경받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혁명과 치국(治國)은 다르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신중국 출범 후 정치지도자로서 탁월한 능력을 드러냈다.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가운데)과 함께 식사하는 저우언라이(왼쪽).

그는 신중국 정부에서 초대 총리 겸 외교부장을 맡아 국민경제 회복과 중국 현대화, 비동맹 외교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의욕적으로 추진한 과학기술 현대화 정책은 현재의 강대국 중국 건설의 초석이 됐다. 그가 총리를 맡은 기간에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둥팡훙(東方紅)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덩샤오핑은 생전에 “1960년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없었으면 1970년 위성 발사도 없었을 것이고, 중국이 현재와 같이 대국으로 자리 잡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저우언라이 시대를 칭송했다. 그는 1971년의 미중 화해 무드와 1972년의 중일 국교 정상화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해 국제적으로도 유연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남겼다. 1976년 그가 사망하자 대규모 추모집회가 열리고, 이는 문화혁명 4인방 타도를 주장하는 제1차 톈안먼(天安門)사태로 이어져 이듬해 마오쩌둥 사망 후 문화혁명이 막을 내리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톈진의 저우언라이·덩잉차오기념관에서 만난 톈진 시민 리더구이(李德貴·66)는 이렇게 말했다.

“지도자들은 모두 인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인민 총리’ 저우언라이만큼 진심으로 인민을 사랑한 사람은 많지 않다. 지도자들은 인민을 위해 봉사한 그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톈진=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





◆저우언라이 약력

▲1898년 3월5일 장수성 화이안부 산양현 출생

▲1913년 톈진 난카이학교(현 난카이대학) 입학

▲1917년 9월∼1919년 4월 일본 유학

▲1919년 귀국 후 5·4운동 참가

▲1920년 프랑스 파리대학 유학

▲1921년 중국공산당(중공) 파리지부 설립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성립 후 귀국

중공 광둥구위원회 위원장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1925년 덩잉차오와 결혼

▲1927년 국공합작 결렬 후 8·1 난창 무장봉기 주도

▲1934년 10월 장정 시작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성립

▲1938년 국민정부 군사위 정치부 부부장

▲1945년 일본 패전

▲1947년 8월 국공내전 재개

중공 중앙군사위 부주석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총리 겸 외교부장 취임

▲1971년 9월 문화혁명 기간 중 덩샤오핑 복귀 주장

▲1972년 9월 중일 공동성명에 서명

▲1976년 1월8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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