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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천년학’ 천국으로 ‘훨훨’

입력 : 2008-08-01 09:31:14 수정 : 2008-08-01 09: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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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이청준의 삶과 문학세계

 

전남 장흥 진목리에서 5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가난과 불행 탓에 일찌감치 한(恨)의 정서가 몸에 뱄다. 여섯 살 때, 세 살 터울 아우가 죽은 뒤 폐결핵으로 맏형이 요절하고, 이어 부친까지 타계하는 불운을 겪는다. 죽은 맏형이 다락방에 남긴 책과 독후감, 일기가 그를 조숙한 문학도로 키웠다. 1966년 ‘사상계’에 갓 입사했던 시절, 하나 남은 형마저 사망한다. 장례비가 없어 곤란을 겪자 ‘병신과 머저리’를 써 비용을 충당했다. 빈곤, 형제의 잇따른 죽음은 대학 초년시절 겪었던 4·19, 5·16과 함께 그의 문학관을 형성한 중요한 뼈대였다.


◇하얗게 센 머리칼을 노모에게 보이기 죄스러워 했다는 이청준. 그의 성품과 문학은 은근하고 부드러웠지만 늘 사물의 핵심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여기서 가지를 친 장인정신, 자유사상은 43년간 20여권의 소설집, 10권 이상의 장편소설을 빚었다.

제12회 동인문학상을 받은 출세작 ‘병신과 머저리’(1966)는 두 형제의 세계관을 대립시켜 지식인의 내면을 탐구했다. 1960년대에는 줄광대, 매를 부리는 사람, 궁사를 소재로 한 ‘줄’, ‘매잡이’, ‘과녁’ 등을 발표한다. 이들 장인의 비극적 삶은 산업사회의 가치에 눌린 전통, 인간성을 부각하며 이청준 소설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70년대에는 소록도에 갇힌 나환자들을 통해 억압적 권력과 개인의 자유를 성찰한 ‘당신들의 천국’(1976), 가난에 대한 원죄의식을 슬프게 묘사한 ‘눈길’(1977) 등을 집필했다. 문학과지성사판 ‘당신들의 천국’은 2003년 1월 100쇄 발행을 넘어섰고, 2008년 7월 현재 114쇄를 기록 중이다. 100쇄를 돌파한 또 다른 장편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1·홍성사)는 현재까지 116쇄를 찍었다.

1973년 그는 연작소설 ‘언어사회학 서설’의 제1편 ‘떠도는 말들’을 발표하면서 현대 언어생활의 방종과 혼돈을 지적한다. 1980년대에는 순결한 정신을 현대적 감각으로 승화시킨 작품을 생산했다. 80년대 전반을 결산하는 ‘비화밀교’(1985), 후반을 대표하는 ‘키 작은 자유인’(1990) 등이 이때 완성됐다.

1990년 들어서도 창작열은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했던 장편 ‘축제’(1996)를 비롯해 장편 ‘인문주의자 무소작 씨의 종생기’(2000), ‘신화를 삼킨 섬’(2003), 소설집 ‘꽃 지고 강물 흘러’(2004),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2007) 등으로 생애 마지막까지 장인정신을 벼렸다.

한국 영화계는 소설가 이청준에게 빚진 것이 많다. 지난해 배우 전도연에게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밀양’은 그의 소설 ‘벌레 이야기’(1985)가 원작이다. 단편 ‘석화촌’은 1972년 영화화돼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1993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이장호 감독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이 그의 소설을 모태로 삼았다.

이청준의 절친한 친구이자 작고한 평론가 김현은 존경할 만한 작가로 ‘토지’의 박경리와 이청준, 단 둘을 꼽았다. 그는 두 거장에 대해 “거의 순교자적인 태도로 작품에 달려들고 있다”면서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신경을 쓰는 듯이 보이는 작가들에게 이런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크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오롯이 문학에 헌신한 까닭은 소설가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소설가, 혹은 문학을 ‘깜깜한 밤길을 앞서간 선행자’로 비유해 왔다. 불확실하고 외로운 인생길을 걷는 인간은 앞서간 선행자가 있다는 말만으로도 불안감을 떨친다는 것이다. 떠들썩하게 사랑을 외치는 대신 조용히 곁에 다가가 한 편이 되는 것이 그의 처세이자 문학이었다.

한국 사회가 ‘당신들의 천국’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길 바랐던 인간주의자 이청준. 그는 폐암과 싸우면서도 “겪고 있는 고통을 함부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꼿꼿한 군자의 모습을 남기고 그의 천국으로 떠났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이청준 연보 ▲1939년 전남 장흥군 진목리 출생. ▲1960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입학. ▲1965년 월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퇴원’ 당선. ▲1968년 남경자와 결혼. 월간 ‘아세아’ 창간에 참여. ▲1972년 중·장편집 ‘소문의 벽’ 출간. 단편 ‘석화촌’이 영화화되어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 ▲1976년 장편 ‘당신들의 천국’, 소설집 ‘이어도’ 출간. ▲1981년 외동딸 은지 출생. ▲1993년 연작소설 ‘서편제’ 출간. 임권택 감독이 영화화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수상. ▲2000년 장편 ‘낮은 데로 임하소서’ 100쇄 발행. ▲2003년 ‘이청준 문학전집’(열림원) 총25권 완간. ‘당신들의 천국’ 100쇄 발행. ▲2007년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출간. 폐암 말기 판정. ▲2008년 6월 서울삼성병원에 입원, 7월31일 영면. ▲동인문학상(1967),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신인상(1969), 이상문학상(1978) 이산문학상(1990) 호암예술상(2007)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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