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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 기반한 전통 무예 ‘태격'을 아십니까?

입력 : 2008-11-12 16:33:06 수정 : 2008-11-12 16: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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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지역 경주 김씨 반가(班家)에서 400여년 동안 내려오고 있는 무예로 한국무예사적 가치 커 “유교의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전통 가전무예 ‘태격(太擊)’을 아십니까?”

전북 김제지역 경주 김씨 반가(班家)에서 400여년 동안 내려오고 있는 ‘태격’을 계승발전시키고, 한국무예사적 가치를 찾아내기 위한 ‘태격 발굴 보고대회’가 오는 14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김제시는 “이날 대회에서는 ‘태격의 역사와 특성’, ‘태격의 사상과 배경’, ‘태격의 호흡과 동작’을 주제로 한 연구발표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12일 밝혔다.

김제시와 한국무예연구소에 따르면 태격은 전라북도 김제시에 거주하는 경주김씨 집안에서 약 400년 전부터 내려온 전통무예이자 가전무예로 추정된다. 그동안 우리나라 전통무예인 씨름, 활쏘기, 태껸 가운데 가전(家傳)으로 내려온 무예가 거의 전무한 현실에서 본다면, 태격의 발굴은 한국무예사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획기적인 일로 평가된다.

태격의 유래는 17세기 중엽 김우정(월성부원군파 10대손)부터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 이를 증명할 자료는 없다. 다만, 김우정의 5대조 형손의 사위인 어세공이 이름난 유생으로 맨손무예 수박을 잘했다는 기록이 성현의 ‘용재총화’에 확인된다. 이는 어세공이 처가인 경주김씨 집안에 수박을 전했을 것을 암시하는 근거로, 태격이 17세기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15세기 중엽부터 수박의 전통이 집안에서 이어져 왔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경주 김씨 가전무예는 16세기중엽 김우정의 증조부 원일이 전라도 만경(현 김제시)에 정착한 후에 비로소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된다. 사옹원봉사 원일은 사촌형 진사 호와 함께 사림파의 종장인 조광조의 문인으로, 을사사화(1545년)때 만경으로 피신해 내려 왔다. 만경에 정착한 경주 김씨는 대대로 도학을 잃지 않고 과거나 관직 대신에 처사적인 삶을 고집한다. 그 과정에서 원일의 증손자인 김우정이 심신수련의 방법으로 태격 이론과 실기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이름붙인 태격의 명칭에서 확인된다. 태격은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음차해 만든 용어로써, 심신수련을 통해 우주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율곡의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만든 명칭이다. 김우정부터 태격이 내려왔다는 집안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태격은 만경의 지역무예와의 접촉과 영향 속에서 더욱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만경은 호남평야를 무대로 일찍이 씨름, 수박 등이 발달하여 고려 무신 두경승을 비롯한 호남 씨름을 대표하는 장사가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태격은 평야지대라는 지역의 환경과 더불어 민간무예 요소와 결합함으로써, 그 지역의 독특한 무예체계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태격은 조선후기 내내 경주김씨의 가전무예로써 이어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19대손 김병화(1883~1941)대에 와서 문서로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천하태격대보도’의 필사본 그림이 서양화법에 의해 그려진 때문이다.

‘천하태격대보도’에는 무예의 사상적 이론체계와 동작들이 한국전통 무예의 맥락을 잘 계승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양생에 기초한 좌식 호흡법인 부상만정, 호흡법에 기초하여 서서히 연마하는 중성공지법, 응용동작으로서 인화중통이라고 불리는 53세 자세가 갖고 있는 무예의 원형성 등이 그것이다. 유교의 호연지기에 의거한 호흡법과 이에 기초한 태격은 한국 전통무예의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무예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김병화는 심신수련에 기초한 도학을 추구하는 가학의 전통과는 달리 태격에 지나치게 빠져 한량적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경주김씨 집안은 그만 반가(班家)로서의 위상을 잃을 뿐 아니라, 가세가 완전히 기울고 말았다. 1941년 김병화가 사망하자, 집안 내에서는 가전으로 내려오던 태격을 철저히 금할 뿐 아니라 그 존재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현재 경주김씨 집안 내에서조차 태격의 존재를 아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됐다.
더구나 김병화의 셋째 아들인 화석 김수연(82)씨가 구한말 호남의 대표유학자인 간재 전우선생의 재전제자인 서암 김희진에게 수학함으로써 율곡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해 온 터에 자칫 무(武) 문화로 비칠 태격의 존재는 세상에 빛을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김병화의 장남이자 20대 종손 김동준(1915~1975)이 어머니 몰래 태격을 계승하여 1950년대말 ‘천하태격대보도’의 낡은 원본을 필사본으로 다시 모사하게 하는 한편, 자신의 네 아들 대신 셋째 동생 김수연의 막내아들인 김종회에게 전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태격이 갖는 무예사적 가치와 의미는 첫째로 한국에서 400년이 된 가장 오래된 민간무예이자 거의 유일한 가전무예다. 한국의 전통무예는 그 유래는 오래됐지만, 그 계통이 분명히 이어져 온 민간무예가 발견된 예는 없었다. 오랫동안 문치주의를 유지해 온 우리나라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가전으로 내려온 무예의 사례는 거의 존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아래서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전해온 태격의 발견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한국 전통사회에서 자생적으로 민간에서 무예를 통해 심신을 길러온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다.

둘째로 성리학적 이론체계와 실기를 갖춘 심신수련을 위한 선비무예다. 태격은 퇴계와 함께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 가운데 한 분인 율곡 이이의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에 기초한 무예라는 특징이 있다. 태격은 심신수련을 통해 우주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원리에 기초하여 무예가 체계화했다. 기의 변화 속에서 만물의 이치인 태극을 이해하려고 한 율곡의 이기일원론 사고를 기초로, 마음의 수양과정을 몸 수련을 통한 과정으로 확장시키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태격 전수자인 김종회씨가 태격 시연을 하고 있다.
현재 경주 김씨는 율곡학파를 계승한 전우 간재의 학통을 화석 김수연이 잇고 있으며, 지금도 경전을 익혀 도덕을 함양한 후에 태격을 연마시키는 전승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제까지 국내에서 불교나 도교에 근거한 무예는 있었지만, 유교에 기반한 무예가 밝혀진 사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동시에 한국무예의 중요한 특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셋째로 한국무예의 전통과 맥을 계승해 온 맨손 무예이자 지역무예다. 태격은 15세기 서울의 수박 전통에 기원하여 지역적으로는 만경지역의 수박 전통을 바탕으로 발달한 무예라는 점에서, 한국 전통무예의 계통을 잇고 있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20세기 초반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하태격대보도는 좌식호흡, 입식호흡, 응용동작이라는 세단계의 무술구조로 이루어진 종합무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53가지의 무예동작을 하나로 연결해 보여줘 전통적인 한국의 무예서가 발달시켜온 형식을 취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천하태격대보도는 임진왜란 이후 한국 최초의 권법서인 ‘무예제보번역속집(1610)’ 내의 권보, ‘무예신보(1759)’내의 권법, ‘무예도보통지(1790)’내의 권법을 계승하는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태격은 손 중심 기술체계에서 발 중심 기술체계로 전환되어 가는 변화 과정의 체계를 담고 있다. 이는 오늘날 태껸이 발 중심의 동작으로 발달해 가기 전 단계의 원형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오늘날 태껸 동작의 특징으로 보이는 굼실거림의 움직임, 즉 채답보가 확인되는 동시에 박치기와 같은 싸움 수가 확인됨으로써, 오늘날 태껸의 원형적 특징과 일치하는 면이 잘 드러난다.  
넷째로  태격은 내공법과 외공법을 겸비한 전통무예다. 몸을 기르는 방법에는 몸 안의 기운을 기르는 내공법과 몸 밖의 힘을 기르는 외공법이 있다. 보통의 무술들은 외공법에 수련의 비중을 크게 두고 있다. 동양의 한중일 무술에서 특히 한국무술이 크게 구별되는 점은 바로 내공법 수련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한국무술에서 내공법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것은 내공법 자체가 없음이 아니라 무술에서 내공법의 운용을 크게 활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까닭은 한국무술은 놀이중심으로 무술을 발달시켰기 때문에 무술의 철학화, 의학화, 내공화를 하지 않았다. 물론 무술과 연계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양생이나 단전 등은 발달했으나, 이를 무술 수련에 활용한 사례는 현재까지는 별로 찾아지지 않는다. 중국무술이나 일본무술이 17세기 이후 기공법과 관련한 무술 발전이 이루어지거나, 내공법과 관련한 무술 발전이 이루어진 점과 달리 한국무술에서의 내공법이 부족한 점은 한국무술의 특성인 동시에 오늘날 약점임에 틀림없다.

태격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단순히 전통무예의 발견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경서를 연마하고 태격을 함으로써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기름을 위해 취하는 공부방법론이다. 정신만을 유독 강조해 온 우리의 문화적 기반에서 볼 때, 태격은 심신수련을 통한 새로운 공부론의 모델로 제시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체육대 심승구 교수는 심 교수는 “태격이나 고려시대 무신 두경승과 극진가라데를 창시한 최영의와 같은 인물, 태권도 지도관 출신들이 이곳에서 배출됐다는 사실은 김제지역이 무예가 발달했음을 대변해주는 근거다”고 설명했다.

김제시는 지난해 전국 태권도 품새대회에서 ‘태격’을 처음 소개했으며, 태권도 관련 기관과 한국무예 역사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지난해 10월 김제지평선축제 개최시 메인 행사로 태격시연 행사를 개최했다.

이건식 시장은 “전통무예 ‘태격’을 향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및 국책사업으로 유치, 전북을 전통무예 산실로 자리매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주=박찬준 기자 skyland@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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